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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시각각

기념비적인 '50억 무죄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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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장

이른바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은 한국 사회, 특히 공직자를 옥죄곤 했다. 밥 한 끼 먹을 때도, 장례식에 갈 때도, 명절 선물도 눈치를 봐야 했다. 특히 100만원 이상 금품이면 직무 관련이나 대가가 없어도 처벌이 가능했다. “대한민국이 경찰국가냐”는 반발에도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대의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법이 아무리 냉혹해도 세상엔 온기를 심으려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곽상도 아들 50억 무죄’ 판결을 내린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이준철 부장판사)다.

대장동 개발사업을 돕고 아들을 통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뉴스1

대장동 개발사업을 돕고 아들을 통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뉴스1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 병채씨는 화천대유에서 5년10개월간 근무했다. 퇴직 당시 연봉 4000만여원의 대리였다. 이런 근속연수면 통상 2200만여원의 퇴직금을 받지만 병채씨는 그보다 200배가 넘는 50억원을 받았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곽 전 의원은 대장동 사건이 불거질 즈음 국민의힘 부동산 투기 특별조사위원이었다. 직무연관성이 있다는 얘기다. ‘정영학 녹취록’엔 김만배씨가 “병채 아버지가 돈을 달라고 그래. 병채 통해서”라거나 “병채가 아버지에게 주기로 한 돈을 달라고 해서 머리 아프다”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이 정도면 누구나 병채씨 퇴직금 50억원이 아버지 곽 전 의원을 보고 준 뇌물이라고 여기겠지만, 법리(法理)에 투철한 재판부는 흔들리지 않았다. “(병채씨가) 성인으로 결혼해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했다”는 논거가 결정적이었다.

결혼한 자식이라 무관하다는 판결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재판부의 고뇌가 담겨 있다는데…

 이번 판결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대중 권력에 휘둘리지 않은 용기의 소산이요,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그 첫 번째가 앞에서 말한 김영란법으로 위축된 사회 전반에 활력을 주겠다는 취지다. 두 번째는 획기적인 저출산 타개책이다. 이만 한 ‘자식 찬스’가 어디 있나. 이제 나는 100만원을 받아도 감옥행이지만 내 자식은 남에게 50억원을 받든 100억원을 받든 문제가 안 된다. 상속세도 없다. 단 결혼하거나 따로 살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아니면 조민씨처럼 장학금 600만원을 받아도 유죄가 된다.

 세 번째가 가장 의미있다. 탈근대화다. 한국 사회엔 여전히 유교적 폐습이 잔존해 자식이 부모를 섬기거나 부모가 자식을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팽배하다. 그래서 ‘아들 돈=아버지 돈’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결혼해 독립하면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도 사실상 타인’이라는 이번 판결로 구시대적 가족 문화도 변화의 계기가 마련됐다.

2009년 5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밤 늦게까지 조사를 받은 뒤 청사를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2009년 5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밤 늦게까지 조사를 받은 뒤 청사를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아쉬운 점은 이런 역사적인 판결이 다소 늦게 나왔다는 점이다. 조금만 빨랐어도 한국 현대사의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조카사위 등 노 전 대통령 일가가 640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2009년 검찰 수사를 받았다. 결혼한 자식이 남인데 조카사위라면 생판 모르는 사이 아닌가.

더 억울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본인 자식이 아니라 측근(최서원)의 자식(정유라)이, 그것도 말이 아니라 말 관리비를 대기업에서 후원받았다고 구속됐다. 이때 등장한 논리가 그 유명한 ‘경제공동체’와 ‘묵시적 청탁’이다. 50억원 무죄 판결이 일찍이 판례로 자리 잡았다면 전직 대통령 자살이나 현직 대통령 탄핵과 같은 시대적 아픔을 피했을지 모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짤막한 입장을 밝힌 후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짤막한 입장을 밝힌 후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생뚱맞은 건 민주당이다. 50억원 무죄 판결을 맹비난하고 있다. 이번 판결 기조가 흔들리면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이나 성남FC 사건에 악영향을 끼칠 텐데 말이다. 게다가 50억원 무죄 재판부는 대장동 사건 1심도 맡고 있다. 호사가들 사이엔 ‘50억원 무죄는 이재명 무죄를 위한 밑밥 깔기’라는 소리도 있지만, 이는 시대를 앞서간 재판부의 안목을 모욕하는 언사다. 불행한 역사가 반복돼선 안 되며, 억울한 정치 지도자를 막으려는 사법부의 고뇌를 외면할 것인가. 민주당은 자중자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