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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가발이 어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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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심새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심새롬 정치팀 기자

심새롬 정치팀 기자

“그 사람, 진짜 가발이야?”

우리는 여전히 가발 수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대한탈모치료학회 추산 국내 탈모 인구 1000만명, 19세 이상 성인 기준 4명 중 1명이 머리카락 걱정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그가 가발인지’를 몹시 궁금해한다. 가발 또는 탈모를 커밍아웃한다는 의미의 ‘가밍아웃’ ‘탈밍아웃’ 용어 등장은 ‘탈모=감추고 싶은 것’이라는 오랜 인식의 방증이다.

이제 탈모에 있어서만큼은 사회 전반이 요즘 2030세대의 쿨하고 솔직한 분위기를 좀 흡수했으면 좋겠다. 유튜브 등 1인 미디어를 중심으로 배우, 개그맨, 유명 웹툰작가의 탈밍아웃이 이어지는 현상을 남일로만 바라보지 말자는 얘기다. 여배우 고은아씨는 지난해 9월 유튜브 채널에 ‘고은아 드디어 머리 심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모발이식 시술 후 카메라 앞에 앉아 “34살 인생의 숙제를 드디어 풀었다. 보람 느끼게끔 관리를 잘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소비재 박람회에서 관람객이 전시된 가발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소비재 박람회에서 관람객이 전시된 가발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아이돌 탈밍아웃의 원조로 불리는 그룹 비투비(BTOB) 프니엘은 23살이던 지난 2016년 지상파 방송에 민머리로 나와 “머리카락 70%가량이 이미 빠졌다”고 고백했다. 만성 스트레스로 ‘땜빵’이 일주일에 하나씩 생겼다던 그는 탈밍아웃 후 오히려 상태가 좋아졌다고 한다. 지난해 헤어라인이 빼곡한 반반 염색 머리로 등장, “이제 포마드도 가능하다”고 인사해 팬들의 큰 축하를 받았다.

박준형·이휘재·김학래·정준하·이상준씨 등 개그맨들도 나이를 막론하고 탈밍아웃을 이어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올 초 더불어민주당에 탈모 고백 릴레이가 반짝 있었다.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가 ‘탈모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공약을 내 박주민·김남국·김원이 의원 등이 1000만 탈모인 대표를 자청했다.

성경 속 삼손 이래 모발량과 업무역량이 상관관계를 가진 적은 없었다. 남 머리 없다고 수군대는 버릇을 나부터 고쳐야 불필요한 가발 논쟁이 사라진다. 우리는 남의 흠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고, 나의 흠에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살아왔다. 아니, 너도나도 머리 빠지는 세상에 대머리가 무슨 흠이냐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도 적잖은 사람들이 장관 A씨, 대통령실 비서관 B씨, 야당 중진 C씨, 전직 총리 D씨의 가발을 이야기한다.

정치인도 연예인처럼 이미지를 먹고 산다. 그래도 ‘예상을 뛰어넘는 진솔함’만큼 중도·수도권·2030 유권자 맘을 사로잡을 감성 카드가 또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애써 감추며 가발을 쓰는 편보다 그냥 시원하게 탈모를 드러내는 쪽이 훨씬 호감이다. 약점을 감추려한 과한 성형에 거부감이 큰 것과 비슷하다. 강제 아웃팅(본인 동의 없는 공개) 말고, 쿨한 가발 인정과 진심어린 응원 같은 것을 정·관계에서도 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