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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위기 맞은 한국경제]기업들 최악 상황 대비, 신규 투자 끊고 임원 임금 삭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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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호 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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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수구 인천신항에서 컨테이너 선적 작업이 한창이다. 수출이 늘고 있지만 에너지·원자재 가격이 뛰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뉴스1]

인천 연수구 인천신항에서 컨테이너 선적 작업이 한창이다. 수출이 늘고 있지만 에너지·원자재 가격이 뛰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뉴스1]

한화그룹의 유화·에너지 사업부문이 이달 초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고 경영 현안을 점검하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 등으로 그룹 주요 계열사의 수익성이 악화하자 경영진이 한 자리에 모여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기계·금융·건설 등 그룹 내 다른 사업부문도 지난달 말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바 있다. 이 회의에서도 ‘위기’ ‘대책’이 언급됐다. 앞선 지난달 20일 현대중공업그룹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고 경영계획 추진 현황을 점검했다. 원자재 가격 급등, 중국의 상하이 봉쇄 조치에 따른 대응 전략을 다시 살피고 유가 변동으로 인한 영향 등을 검토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특히 계열사별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고려해 위기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전 세계적 공급·물류난 출구 안 보여

현대자동차는 경영환경 흐름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했다. 올해 예정된 투자와 신차 출시 연기를 검토하고, 원가 절감을 추진키로 했다. 서강현 현대차 부사장은 지난달 진행한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계획된 투자와 신차 출시 계획 연기를 검토해 손실을 최소화하겠다”며 “공장 운영비용과 원가 절감 등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센티브 축소 및 마케팅 비용을 포함한 판매 비용 절감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지주사 한국앤컴퍼니는 이미 지난달부터 전체 계열사 임원의 임금을 최대 20% 삭감했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으로 타이어 원재료인 고무 가격이 지난해 9월 이후 50% 가까이 올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탓이다.

삼성과 LG·SK도 경영환경을 점검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네트워크사업부에 ‘공급망 리스크 관리’ 조직을 새로 신설했고, LG그룹은 이달 말 구광모 회장 주재로 3년 만에 상반기 전략보고회를 연다. SK이노베이션은 원료 공급 다변화로 원가 변동성에 대응하는 한편, 원가 상승분을 제품 판가에 연동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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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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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가 복합위기에 빠지면서 주요 기업들도 경영환경을 점검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서는 등 사실상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파고를 한 고비 넘자마자 ▶우크라이나 사태 ▶중국 상하이 봉쇄 ▶금리 인상 ▶환율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기업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현 한화솔루션 대표는 이달 초 사장단 회의에서 ‘컨틴전시 플랜’(위기 대응 방안) 수립을 주문하며 “글로벌 에너지 가격과 공급망 차질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도 사장단에 “앞으로의 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위기와 차원이 다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기업들이 내다보는 경기 전망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5월 BSI 전망치는 97.2를 기록했다.

4월 전망치인 99.1보다 1.9포인트 하락한 수치로 2개월 연속 기준선(100)을 밑돌았다. BSI는 100보다 높으면 경기 전망에 대한 긍정 응답이 부정보다 많고, 낮으면 부정이 더 많은 것을 뜻한다. 특히 제조업 BSI 전망치가 93.1을 기록했는데, 이는 2020년 10월(83.4) 이후 19개월 만에 최저치다.

기업들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건 글로벌 공급망이다. 본지 설문조사 결과 10대 그룹을 포함해 기업 13곳 가운데 12곳이 ‘복합위기 요인 중 가장 우려되는 것’으로 ‘공급망 문제’를 꼽았다. 이미 수출기업 10곳 중 8곳 이상은 공급망 위기로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최근 국내 수출기업 1094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85.5%가 물류난 등 이미 공급망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본지 설문에 응한 한 그룹사 관계자는 “물류 등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지금까지 쌓여온 전 세계적 경제 시스템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급망을 제외하고도 최근의 대외 경영환경은 어느 것 하나 기업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한 각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대표적이다. 금리가 오르면 기업들로서는 자금조달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든, 채권을 발행하든 이자를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3.146%로 10년 만에 최고치 수준을 기록했다. 무보증 회사채(3년) ‘신용등급 AA-’ 금리는 연 3.873%로 2년도 안 돼 2.4배나 뛰었다. 최근의 원화가치 하락(환율 상승)도 기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200원 후반대에 머물고 있는데, 환율이 상승하면 보통 국내 수출 기업에겐 가격 경쟁력 확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강(强)달러 현상이 이어지면서 엔화 등 수출 경쟁국의 통화가치가 함께 하락해 가격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다.

“국내 기업 유동성 측면 아직 문제 없어”

여기에 원자재 가격 상승과 맞물려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하고 있다. 당장 무역수지가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은 지난해 동월 대비 12.9% 증가한 578억 달러였다. 하지만 수입이 18.6% 증가한 603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3월에 이어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 이달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5월까지 3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는 2008년 이후 1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런데 본지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은 지금과 같은 고(高)환율이 적어도 올해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기업 2곳은 내년까지 고환율이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주요 수입 원자재에 대한 관세 인하 등을 통해 기업 채산성 악화를 최소화하고 공급망 안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산업계는 이번 위기가 금융위기나 외환위기 때처럼 기업의 연쇄 부도 등 대혼돈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아직 실적이 살아 있고 기업들의 기초체력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기 때문이다. 본지 설문에 응한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과거보다 현재 경제 규모가 더 크고, 경제 구조도 더 선진화 돼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만큼 이번 위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도 “국내 기업의 유동성 측면에서 아직 문제가 없고 은행의 건전성도 양호한 편”이라고 전했다. 박가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정부는 물류난 등 문제 해결에 힘쓰는 한편, 상시 모니터링 강화를 통해 기업들이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경제, 당분간 부침 있겠지만 큰 문제 없을 것”

국내 기업은 미국, 중국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 두 나라는 국내 기업들의 주 무대다. 관세청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이 국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2%(수출액 기준)에 이른다. 수입액도 두 나라를 합치면 34.4%로, 미국이나 중국이 경제적 위기 상황에 빠지면 국내 기업은 덩달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이들 나라의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미국은 40여 년만의 인플레이션으로, 중국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지역 봉쇄로 성장세가 주춤하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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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설문조사에 응한 기업들은 대체로 양국의 경제 상황을 낙관한다. 부침은 있겠지만 크게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그룹사 관계자는 “중국은 내수시장 중심으로 대외의존도가 34% 정도로 낮은 편이어서 세계경제가 침체하더라도 충격이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중국은 중앙정부가 최근 경제수도 상해를 봉쇄하면서 각종 경제지표가 추락하고 있다. 4월 소매판매와 산업생산 증가율은 각각 -11.1%, -2.9%를 기록했다. 도시 실업률도 전달의 5.8%보다 높은 6.1%를 기록했다. 한 유통사 관계자는 “중국은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성장률 추락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은 경제의 펀더멘탈(기초체력)이 강해 인플레이션에 따른 급격한 금리 인상을 견딜 만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제지표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17일(현지시간) 미 상무부에 따르면 4월 소매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전월보다 0.9% 증가한 6777억 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전문가 예상치인 1.0% 증가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3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5% 증가에서 1.4% 증가로 대폭 상향 조정됐다.

미국의 4월 산업생산은 계절조정 기준 전월보다 1.1% 증가해 전문가 예상치인 0.5% 증가를 웃돌았다. 이로써 미국의 산업생산은 4개월 연속 0.8% 이상 증가했다. 다만 현지에선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6%에서 2.4%로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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