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자동차 구매 정보 플랫폼 겟차에 따르면 이달 현대차 ‘아반떼 HEV’를 구매했다면 9개월, 기아 ‘EV6’는 18개월 뒤에야 받을 수 있다. 중국과 말레이시아 등지의 공장에서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서 완성차 제조에 필요한 반도체의 원재료(소재)와 그 밖의 부품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이런 글로벌 공급망 대란 여파로 지난달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30만6462대로 지난해 4월(32만3672대)보다 5.3% 감소했다. 생필품인 식품에서도 최근 글로벌 공급망 대란 여파가 크다. 1년 사이 식용유 가격이 2~3배(롯데푸드 대두유 84%, CJ제일제당 카놀라유 66%) 오르면서 치킨 등 식용유를 필요로 하는 식품 전반의 가격이 급등한 상태다. 이는 식용유 제조에 필요한 원재료인 팜유(종려 열매에서 짜낸 식물성 유지)를 세계에서 절반 넘게 공급하는 인도네시아 등지의 생산량이 급감한 때문이다.
비용 저렴한 나라 톱니바퀴처럼 연결
천연자원 매장량이나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이라는 ‘자원 빈국’에서 대부분의 제조 기업은 각종 소재를 수입해 중간재나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한다. 때로는 비용 절감을 위해, 또는 기술력 벌충을 위해 부품과 장비를 수입하기도 한다. 해외 공급망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
요즘처럼 유가가 오르거나 해외에서 소재·부품 등을 제때 들여오지 못하면 제품의 생산량 유지가 어려울뿐더러 기업은 단가 상승 압박에 따른 수익성 악화에 놓이기 쉽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2019년 일본 정부가 자국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출을 규제해 한동안 국내 반도체 업계가 어려움을 겪은 게 대표적인 공급망 붕괴 사례”라고 말했다.
이는 비단 국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다국적 기업의 해외 진출로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이 같은 체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 등지에 공장을 세우고 소재·부품을 중국으로 실어 나른 뒤 제품을 만들어 다시 전 세계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더 저렴한 소재·부품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면서 전 세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지금의 글로벌 공급망이 만들어졌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공급망이 어느 한 곳이 아닌, 세계 공통의 아킬레스건이 됐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전 세계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당장 최근에도 중국이 코로나19 재확산 방지를 위해 상하이 등지를 봉쇄하면서 다국적 기업들은 상하이로 소재·부품을 실어 나르기도, 상하이의 공장을 가동하기도, 상하이에서 생산한 제품을 다시 수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소재·부품의 수급이 꼬이면서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의 위기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황은 극에 달했다. 천연가스와 밀 등의 세계적 생산국인 두 나라가 각종 생산·수출에 차질을 빚자 인플레이션은 가속화했다.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고, 이게 또 다시 글로벌 공급망을 위협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침체 속 물가 뛰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특히 최근 글로벌 공급망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각국이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자원민족주의’(가진 자원의 무기화) 행보를 펼치면서다. 리튬 개발 국유화를 선언한 멕시코, 미국과의 패권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희토류 수출 제한 근거를 마련한 중국이 대표적이다. 이는 과거 각국이 경제안보에서 자국 기술 보호와 외부 유출 차단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공급망 리스크 최소화를 경제안보의 중심 과제로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복잡하게 진화해 해결하기 까다로워진 글로벌 공급망 문제가 길어져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신재용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인플레이션이라는 거시경제 상황이 공급망 대란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선뜻 내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서 “공급망 문제 해결 지연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경제 불황 속 물가 상승)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