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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류 시민” 아닌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위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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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20면

나는, 휴먼

나는, 휴먼

나는, 휴먼
주디스 휴먼,
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사계절

책 제목 『나는, 휴먼』의 ‘휴먼’은 주디스 휴먼. 미국에서 고위직을 지낸 장애인 여성이다. 클린턴 행정부에선 차관보, 오바마 행정부에선 국무부 특별보좌관로 일했다. 그 사이 세계은행에서도 일하며 각국을 누볐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어떻게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성취를 이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휴먼은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장애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관시켰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로 인한 신체의 마비를 대중 앞에서 적극적으로 숨겼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거나 이동할 때 도움을 받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장애는 개인이 싸우거나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74쪽)

휴먼이 2018년 테드에서 강연하는 모습. [사진 사계절]

휴먼이 2018년 테드에서 강연하는 모습. [사진 사계절]

휴먼과 그 동료들은 장애를 새로운 관점으로 봤고, 새로운 싸움을 했다. 이 책은 그 인생과 투쟁의 이야기다.

휴먼이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생후 18개월 무렵. 학교에 간 건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처음이다. 휠체어를 탄 채로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던 어린 소녀는 자신의 장애를 그리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역 교육청이 장애 아동의 등교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분투로 그나마 입학한 학교는 장애인만 따로 모아 놓고, 교과수업은 사실상 하루 3시간에 불과했다. 장애인들이 대학에 가거나 전문 직업인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여성의 대학 진학이 남편을 만나는 경로인 양 여겨지던 시절이다. 어머니가 대학 진학을 권한 건 역설적으로 그래서였다. 장애를 가진 딸이 결혼은 힘들 터.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면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본 것이다. 휴먼이 바란 직업은 교사. 장애인 교사는 전례가 없었다. 지역 교육 당국은 휴먼이 걷지 못한다는 것을 문제 삼은 의사 소견을 토대로 자격증 발급을 거부했다. 믿었던 시민단체에 연락했건만, 답변이 황당했다. 당국의 결정이 차별이 아니란다. 전투력이 불타올랐다. 휴먼은 소송을 결심하고 언론을 동원하며 싸움에 나섰다. 1970년, 22세 때였다.

주디스 휴먼과 동료들은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 점거 농성을 비롯한 시위를 벌였고, 장애법 시행 규정 504조에 보건교육복지부장관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사진 사계절]

주디스 휴먼과 동료들은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 점거 농성을 비롯한 시위를 벌였고, 장애법 시행 규정 504조에 보건교육복지부장관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사진 사계절]

그때그때의 경험과 감정을 비장애인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낸 성장 과정도 그렇지만, 이런 싸움의 과정은 이 흥미진진한 책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특히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이 들어간 공공영역에서 차별을 없애는 장애법 시행 규정, 이른바 504조가 실현되기까지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에서 벌인 점거 농성 얘기는 박진감이 넘친다. 준비 없이 시작된 농성에 동참한 시위대 100여명이 외부 통신이 차단되자 창가에서 수화를 활용하는 것 등 극적인 순간이 여럿이다. 음식을 가져온 블랙 팬서, 후원금 수표를 들고 온 유서 깊은 노동조합 등 다른 운동 단체의 지원도 이어진다.

하지만 규정에 서명해야 할 담당 장관은 요지부동. 하루하루 농성을 이어가던 시위대는 토론 끝에 워싱턴에 대표단을 파견한다. 장관의 집 앞에서 촛불시위를 벌이고, 정치인들을 만나고, 백악관을 찾아간다. 기가 막히는 건, 당시 백악관에 장애인이 쓸 수 있는 화장실이 없어서 길 건너 새로 지은 건물까지 가야하는 상황이었단 점이다.

사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휴먼은 더한 일도 겪었다. 고교 졸업식 때는 그가 상을 받아야 할 단상에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에 들려 올라가야 했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장애인이 혼자 탔다는 이유로 비행기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일도 있었다. 휴먼은 비장애인이 상상하기 힘든 경험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고,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됐는지 예리하고 풍부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어느새 그에게 공감하거나 감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계단뿐인 세상에 경사로를 만드는 것을 비롯해 휴먼과 동료들이 주장한 것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평등한 기회의 실현이다. “의원님, 우리는 2류 시민도 안 됩니다. 우리는 3류 시민입니다.” 워싱턴에서 만난 상원의원에게 휴먼의 동료 장애인이 토로한 말이다. 마침내 장관이 시행규정에 서명한 뒤에도 과제는 많았다. 시민권 차원에서 장애인의 평등권을 포괄적으로 규정한 미국 장애인법은 1990년에야 현실화된다. 이 법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순간을 두고 휴먼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흔한 살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되었다.”

문제는 법과 제도만이 아니다. 휴먼은 “사람들이 장애인의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고, 장애인들 스스로도 “동등한 기회를 요구하면서 혹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닌가 부담을 느끼는 마음도 극복해야” 했다고 돌이킨다. 지금 한국에도 유효한 얘기다. 휴먼은 장애가, 더구나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노화 과정에서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란 걸 상기시킨다. 그는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가 이에 맞춰 설계돼야 옳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최근 서울 지하철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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