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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TV 토론이 즐거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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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공식 선거운동 기간 첫 대선 후보 토론회가 21일 열렸다. 서울 마포구 MBC 미디어센터에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국회사진기자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공식 선거운동 기간 첫 대선 후보 토론회가 21일 열렸다. 서울 마포구 MBC 미디어센터에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국회사진기자단]

냉소도 때로는 필요하다. 신 혹은 야수만이 폴리스(정치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지만 지나친 정치 열정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특히 이런 대선판에서는. 내려놓은 마음으로 마주한 TV토론은 의외로 즐거웠다.

수준 낮은 토론이 준 역설적 재미 #과몰입 내려놓으면 눈이 밝아져 #선택 힘들 땐 최악이라도 걸러야

지난번 토론에선 ‘알이백’ 때문에 웃었는데, 21일 토론 때는 ‘기축통화’와 ‘디지털 플랫폼’ 때문에 빵 터졌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더니 경제 용어에 정치적 상상력을 입히는 능력이 놀라웠다. 알이백 때는 단어가 생소해 검색창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익숙한 단어에 혹시 모르는 다른 뜻이 있나 싶어 스마트폰을 들었다.

기축통화. '국제 간의 결제나 금융 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 원화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재명 후보의 발언은 실로 ‘가슴 웅장한 일’이다. 무역 적자는 기축통화국의 운명이라는데(그래야 해외에 자국 통화가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도 올해 들어 하루 평균 1억3000만 달러 적자가 쌓이고 있다. 기축통화 꿈을 위한 과정 아닐까. 미국은 지난해 무역 적자가 하루 23억5000만 달러꼴이라는데, 우리가 너무 쩨쩨한 건가. 원화의 국제 결제 쓰임새가 폴란드 즈워티, 헝가리 포린트 등 이름도 낯선 통화에 뒤지는 현실이 뭐가 대수랴. 1555(수출 1조 달러, 국민소득 5만 달러, 코스피 5000, G5)를 달성하겠다는 경제 대통령이라면 또 모르지.

기축통화 희망가에 민주당이 전국경제인연합회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얼마나 훈훈한가. 해체해야 할 적폐라며 매섭게 몰아붙였던 전경련 아니던가. 기축통화의 꿈을 위해 재벌과도 기꺼이 손잡겠다는 화합 의지는 아닐까.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바스켓 통화'와 좀 헷갈릴 수도 있지. 보고서 제목에도 기축통화라는 단어 나오잖나.

디지털 플랫폼.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앱이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 윤석열 후보는 "삼성전자도 애플처럼 데이터 플랫폼 기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괜한 오지랖이라고 타박하지 말자. 특정 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 특검 수사팀장 혹은 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그 기업 사주에게 세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일이 미안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 세계에 깔린 16억 개의 디바이스로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을 삼성도 부러워하는 건 사실 아닌가.

그런데 삼성전자가 '데이터 플랫폼 기업'이 돼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네이버나 메타(페이스북)처럼 되라는 뜻인가.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TV 같은 제조업은 어떻게 하나. 미·중 무역 분쟁에서 새우등 신세가 된 한국의 몸값을 그나마 높이고 있는 효자 산업인데. 개념 정리가 덜 됐다고? 그래도 강골 검사 출신 정치인의 가열찬 학습 노력만은 인정해주자. 누구처럼 '5G'를 '오지'라고 읽지는 않았잖나. 요령부득의 답이라고 야멸차게 면전에서 고개 절레절레 흔들 것까진 없지 않나.

"A를 찍으면 얼마 안 있어 손가락을 찍고 싶어질 것 같다"고 하자 친구가 대꾸했다. "B를 찍으면 손모가지 찍고 싶어질걸." 궤변이 궤변을 덮고, 의혹이 의혹을 상대하는, 막장 선거판의 서글픈 술자리 농담이다. 차분한 정책 경쟁은 이미 기대를 접었다. 도토리 키 재기만도 못해 깨알 길이 재는 듯한 공약을 찬찬히 뜯어 봐서 뭐하나 싶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대통령 잘못 뽑으면 나라 망할 것 같지만, 꼭 그런가. 정부 수립 이후 탄생한 12명의 대통령이 하나같이 실패했다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다. 오늘(25일) 저녁은 정치 분야 토론이다. '절실' ‘절박’ 같은 팍팍한 단어는 잠깐 내려놓은 채 캔맥주 하나 들고 올림픽 관람하듯 TV 앞에 앉아 보시길. 마음을 비우면 눈이 밝아진다. 어떤 걸 간수하는 게 그래도 더 나을지, 손가락과 손목도 한 번씩 보면서.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