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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파리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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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광주광역시에 복합쇼핑몰을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훈천씨(마이크 잡은 사람). 그의 옆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있다. [뉴시스]

광주광역시에 복합쇼핑몰을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훈천씨(마이크 잡은 사람). 그의 옆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있다. [뉴시스]

지난달 말 서울 상암동의 한 식당에서 광주 카페 사장 배훈천씨를 만났다. 한 시간 남짓의 식사 중 그의 목소리에 가장 힘이 들어간 순간은 복합쇼핑몰에 대해 얘기할 때였다. 그가 유명세를 탄 것은 광주 사람에 운동권 출신(전남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인데도 자영업자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신랄히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자영업자를 힘들게 한 ‘소득주도 성장’이나 K방역의 영업 제한보다 광주광역시의 쇼핑몰 부재를 더 열심히 말했다.

대선에 얽힌 복합쇼핑몰 문제 #토호세력과 위선적 정치인 탓 #정신승리 행복감 강요 멈출 때

한국에서 여섯 번째 큰 도시(인구 기준, 144만 명)에 복합쇼핑몰은커녕 창고형 대형마트조차 없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20여 년 전 기자 초년병 시절 광주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없었지만 당연히 그동안 생겼을 줄 알았다. 경쟁 상대가 될 중간 규모 마트 경영자들, 이들과 이해를 함께 하는 토호세력, ‘상생과 연대의 5월 정신’을 외치는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이 복합쇼핑몰 건립을 막았다고 배씨는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10년 전 2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 파리를 내내 떠올렸다. 대형마트가 드물고, 복합쇼핑몰은 도시 경계 너머에 있는 곳. 골목 상점을 돌며 장을 보는 게 프랑스적 삶이라고 굳게 믿는 시민이 많은 곳. 비싸지만 품질 좋고 신선한 최고급 먹거리는 마트가 아니라 동네 가게에 있는 곳. 개성 넘치는 작은 상점이 즐비해 골목과 거리가 쇼핑몰인 곳. ‘상생과 연대를 말하는 광주인들은 이런 곳을 꿈꾸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광주가 파리가 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사실 파리에서도 그런 전통적 생활양식은 무너지고 있다. 중급 규모 마트가 늘어난다. 골목을 유유자적 걸으며 장바구니에 식재료를 채우는 목가적 삶을 고도의 산업사회는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규격화된 상품에 익숙해져 가고, ‘원스톱 쇼핑’의 편리함을 몸이 기억한다.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의 비율이 예전 같지 않다. 그곳 직장인들 역시 냉동식품과 밀 키트에 의존해 간다.

그래도 파리는 파리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 ‘미국식’ 삶을 혐오하거나 깔보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데 뚜렷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그런 이들을 만족시켜 주는 특색 있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고 이런 삶을 잠시라도 체험해 보겠다며 전 세계에서 몰려와 가성비 대신 가심비를 따져가며 지갑을 여는 이방인들이 있다.

광주가 과연 그런가. 아니면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있는가. 둘 다 회의적이다. 출장길에 종종 둘러본 광주에는 콘크리트 더미만 늘어났다. 아파트가 쉴 새 없이 생겨났고(주택 중 아파트 비중이 약 80%로 세종시를 제외한 광역지자체 중 1위), 도시 외곽에 고속화도로가 잇따라 건설됐다. 그러면서 중흥ㆍ부영ㆍ호반ㆍ대주 등의 건설회사가 급성장했다. 최근 10여 년간 광주·전남을 기반으로 하는 업체가 ‘전국구’ 기업이 된 곳은 건설 분야뿐이다. 공공자금 투입과 건설사와 주변인들의 수혜 시스템이 꾸준히 재생산된다. 예향(藝鄕)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이렇다 할 문화산업이 없다.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을 쓴 조귀동 기자는 광주에 들어선 ‘아시아문화전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언한 “한국의 퐁피두센터”와는 현저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광주에는 왜 복합쇼핑몰이 없는가. 이 질문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어지간한 도시에는 있는데 그곳에는 없는 것이 많다. 그런 것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정치인들이 그런다. 동시에 ‘상생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서울의 재개발을 막아섰던 도시재생론자들과 비슷하다. 정작 그들 대부분은 광주에, 서울의 골목길 낡은 집에 살지도 않으면서 타인에게 ‘정신승리’의 행복감을 강요한다. 이웃 국가의 지배층이 떠오른다. 이번 대선에 얽힌 복합쇼핑몰 논란으로 그런 위선의 일각이 다시 드러났다. 이래서 선거가 중요하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