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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은 방어용으로만" 선명해진 美 핵 기조...韓 일단 환영, 여파에 촉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을 비롯한 핵 보유 5개국 정상이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공동성명에 합의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핵 정책 기조가 보다 선명해지고 있다. 조만간 공개될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첫 핵 태세 검토 보고서에도 핵 사용 조건을 더욱 엄격하게 명시할 전망인데 북핵 위협 아래 있는 한국에 미칠 영향에 정부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5) 국가 정상이 합의한 '핵전쟁 방지와 군비 경쟁 방지' 공동성명.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대목을 5개국이 공동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다. 백악관 홈페이지 캡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5) 국가 정상이 합의한 '핵전쟁 방지와 군비 경쟁 방지' 공동성명.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대목을 5개국이 공동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다. 백악관 홈페이지 캡쳐.

"핵전쟁 없어야" P5 최초 성명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ㆍ러시아ㆍ중국ㆍ영국ㆍ프랑스 정상이 합의한 '핵전쟁 방지와 군비 경쟁 방지' 공동성명의 핵심은 핵전쟁을 막는 데 있다. 특히 "핵무기는 공격을 억지하고 전쟁을 예방하는 방어적 목적에만 사용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성명에 참여한 5개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5)으로, 현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에 P5 국가 정상이 전부 동의한 건 처음이다. 이전에는 미ㆍ러 양국 간에만 합의가 있었다.

이를 두고 구속력이 없는 이상적인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미국이 이처럼 중국, 러시아까지 동참시키며 핵전쟁과 군비 경쟁 방지에 열을 올리는 건 미 민주당 진영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탈핵 기조의 연장 선상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표방했지만 실질적 결실을 보지 못했던 '핵무기 없는 세계' 정책을 바이든 행정부에서 계승 및 발전시키려는 측면도 있다.

5개 핵보유국 공동성명 어떤 의미 갖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5개 핵보유국 공동성명 어떤 의미 갖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곧 공개될 NPR, '단일목적'은 포함할 듯

연초에 발간 예정인 미국의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에는 이런 미국의 핵 정책 기조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당초 자국이 핵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는 '핵 선제 불(不) 사용'(no first use) 원칙을 NPR에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미국의 핵 확장 억제가 손상될 수 있다는 동맹의 우려로 이는 사실상 철회했다고 한다.

대신 핵 공격을 가한 대상을 보복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핵을 쓴다는 ‘단일 목적’(Sole Purpose) 정책은 NPR에 명시될 가능성이 크다. 핵무기 사용의 범위를 오직 핵 공격에 대한 억지와 반격으로 한정함으로써 핵 선제공격의 여지를 차단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동맹과 우방국 사이에선 NPR에 '단일 목적'만 포함되더라도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 의도적 모호성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억제 효과가 상당 부분 상쇄될 거란 우려가 있다. NPR 작성 과정에서 지난해부터 동맹의 의견은 적극적으로 청취했던 바이든 행정부는 '핵 선제 불사용'에선 한 발 물러서더라도 '단일 목적'만큼은 NPR에 포함하겠다는 구상인데, 전문가들은 NPR에서 해당 원칙을 설명하는 세부 용어와 단서 조항 등에 따라 구체적 함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북핵 코앞에 둔 韓...'확장 억제 영향 줄까' 촉각

정부는 P5의 핵전쟁 방지 공동성명은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4일 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NPT에 기반한 국제 핵 비확산 체제 강화, 그리고 국제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5일까지 P5 공동성명에 공개적으로 환영과 지지를 표한 건 한국 정부 외에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일본 관방장관,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 앤 린드 스웨덴 외교 장관 정도다. 한국의 환영 입장 표명이 상대적으로 빨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과 앤 린드 스웨덴 외무장관은 공동성명이 발표된 당일인 3일에 각각 대변인 명의 성명과 트위터 메시지를 냈다. 스웨덴은 핵 비보유국 16개국으로 구성된 스톡홀름 이니셔티브의 공동 의장국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하루 뒤인 5일에 환영 입장을 밝혔다. 트위터 캡쳐.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과 앤 린드 스웨덴 외무장관은 공동성명이 발표된 당일인 3일에 각각 대변인 명의 성명과 트위터 메시지를 냈다. 스웨덴은 핵 비보유국 16개국으로 구성된 스톡홀름 이니셔티브의 공동 의장국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하루 뒤인 5일에 환영 입장을 밝혔다. 트위터 캡쳐.

다만 북핵을 코앞에 둔 한반도의 안보 현실을 고려할 때 한국은 미국의 핵 정책 변화로 인한 파급 효과를 세세하게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핵전쟁을 막겠다는 대의를 위해 핵무기 사용과 관련한 전략적 모호성을 줄인다면 동맹에 제공하는 핵 억지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이 새로운 NPR에 핵에만 핵으로 대응한다는 '단일 목적' 원칙을 명기한다면 북한으로썬 생화학 무기 등 핵무기 외에 다른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유인 요인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핵확산 방지와 군축 측면에서는 P5 공동성명을 환영했지만, 향후 미국의 핵 정책 변화가 한국에 대한 확장 억제에 영향이 없도록 미국과 긴밀히 협의한다는 입장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4일 기자들과 만나 "기본적으로 이번 P5 공동성명은 최근 미국과 서방, 중국, 러시아가 긴장 상황에 있는 가운데 정상 차원서 핵 충돌 방지 원칙을 공동 확인하고 대화 동력을 마련한 데 의의가 있다"며 "앞으로 기대감을 갖고 볼 것이며, 미국의 세세한 정책 변화는 현 단계에서 언급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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