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주한미군 철수|아이젠하워가 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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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950년 북한의 남침을 불러일으킨 직접 인적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49년 미국의 주한 미군 철수결정은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드와이트 아이겐하워 장군의 끈질긴 주장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전 미 국무부 고위관리가 주장했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 입안에 깊숙히 관련해 왔으며 한국 전 당시 미 국무부 정책기획 참모실장을 역임한 풀니츠씨는 최근 출간된 가신의 회고록 『히로시마에서 글라스노스트까지』 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핵무기사용이 검토되었으나 미국이 당시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 보유량이 중국군과 소련군을 대적하기엔 충분치 못해 이를 포기했었다고 말했다.
니츠씨는 아이젠하워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이 한국 통일문제를 둘러싼 미소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47년 합동 참모부를 설득, 4만5천명의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장군은 미국의 대소전쟁에서 한국은 전략적 중요성이 없으며 주한 미군의 조기 철수가 미국의 전략적 입장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논리를 제시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같은 논리로 합참 간부들을 설득, 미 국가안보회의(NSC)에 이를 권고하는 비망록을 제출토록 했다.
당시 미 국무부는 마셜 장관을 비롯, 거의 대부분이 주한 미군의 철수가 언젠가 정부전복이나 직접공격을 통해 남쪽지배를 달성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기도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고 정보분석가들도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니츠씨는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이 미 육군의 끈질긴 압력에 따라 마지못해 아이젠하워 장군의 철수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주한 미 전투병력은 5백명의 고문단을 제외하고 49년 7월까지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츠씨는 이 회고록에서 50년1월 신임 국무장관인 딘 에치슨이 미 기자 클럽에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발언을 한 것이 북한의 남침을 초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에치슨 장관의 발언은 당시 미 합동참모부의 전략적 권고를 재확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니츠씨는 그후 아이젠하워 장군이 최종 철군이 이루어지기 전 예편, 컬럼비아대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50년 한국 전쟁이 터진 후 5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 트루먼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군결정을「비극적인 정치적 실수」라고 비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의 한국전 참전 때 핵무기 사용이 검토되었으나 그 당시 미국이 중국군과 확전시 재입이 예상된 소련에 대항할 충분한 핵무기를 보유치 못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이것이 맥아더 장군의 확전 논리가 트루먼 정부에 의해 거부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니츠씨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실제목적은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 모택동 정권을 무너뜨리고 장개석 정권을 재수립하는 것이었음을 당시 케이블 통신을 보고 알게되었다고 말했다.
휴전을 위해 중소와 비밀교섭 통로를 찾았었다고 밝힌 니츠씨는 휴전협상이 전쟁포로 송환문제로 2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 포로 석방 조치로 휴전협정이 서명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니츠씨는 또 한국 전쟁의 발발은 49년 창설되어「종이동맹」에 불과했던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를 군사기구로 급격히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니츠씨는 한국전이 끝날 때까지 국무부 정책기획 실장을 맡았고 그후 해군장관, 국방부 차관, 미 군축 협상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군축 문제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부의 자문대사로 있다.【뉴욕=박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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