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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모 성추행 수사가 부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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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미국 뉴욕주 검찰이 3일(현지시간) 공개한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봤다. 165쪽이나 되지만 술술 읽힌다. 딱딱한 법률 용어가 아닌 평이한 문장을 사용한 데다 상황 묘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다는 ‘사실 확인’이 113쪽,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보고서는 매우 상세했다. “주지사가 2020년 11월 관저에서 ‘보좌관 #1’을 포옹하면서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는 식이다. 보좌관 #1은 그 일을 “무덤까지” 가져갈 계획이었지만, 쿠오모가 3월 3일 기자회견에서 “누구도 부적절하게 만진 적이 없다”며 다른 여성이 제기한 성추행 혐의를 부인하자 마음을 바꿨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레티샤 제임스 미 뉴욕주 검찰총장(왼쪽)은 3일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성추행 의혹이 사실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레티샤 제임스 미 뉴욕주 검찰총장(왼쪽)은 3일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성추행 의혹이 사실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피해 사실 기술은 구체적이다. ‘경찰관 #1’은 경호 근무 중 엘리베이터에서 쿠오모가 뒷목부터 허리까지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봐, 너”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경호원도 있는 자리였다. 출입문을 열어줄 때 쿠오모가 배와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최초 폭로자인 린지 보이란 전 특별보좌관은 쿠오모가 전용기 안에서 “옷 벗기 포커를 치자”고 제안하고, 한 번 입술에 키스했다고 진술했다.

보고서는 가학적인 근무 환경도 지적했다. “공포와 겁박”이 난무하는 사무실 분위기가 “유독하다(toxic)”고 했다. 샬럿 베넷 비서는 2019년 10월 주지사 집무실에서 쿠오모가 보는 앞에서 팔굽혀 펴기 20개를 해야 했다. 쿠오모가 고함치며 화내는 통에 수시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진술도 나왔다. 장기 집권으로 견제가 약해진 민주당 3선 주지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수사팀은 5개월 가까이 쿠오모를 포함, 179명을 조사했다. 여성들이 피해를 본 뒤 충격 속에 친구·동료·가족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목격자와 관계자 진술, 쿠오모 참모들의 이메일, 사진 등 증거를 수집해 피해 사실을 입증했다. 뉴욕타임스가 “보고서는 여름 끝 무렵 공개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보도한 지 하루가 안 지나 검찰이 기자회견을 열고 수사 결과를 발표할 정도로 보안이 유지됐다.

레티샤 제임스 뉴욕주 검찰총장은 외부 변호사 2명을 선임해 독립 수사를 맡겼다. 피해 주장과 반론이 팽팽한 가운데 수사팀은 증거를 바탕으로 어느 쪽이 더 신뢰할만한지 평가했다. 그렇게 작성한 방대한 보고서는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했다. 공박은 이걸 토대로 진행될 것이다. 억측과 장외공방전은 설 자리가 없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는 수사 결과를 토대로 쿠오모 사임을 촉구했다. 한때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된 거물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미국 조야의 성숙한 자세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