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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일본에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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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다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라는 일본 배우가 있다. 1990년대 한국서도 큰 인기를 끈 ‘셸 위 댄스’라는 영화에서 단발머리 가발에 현란한 춤솜씨로 관객들을 웃겼던 그 배우다. 지난 23일 열린 도쿄올림픽 개회식 공연에서 다케나카는 목수의 우두머리인 도편수 역할로 출연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회식 전날, 스스로 불참을 결정했다. 1985년 한 콩트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내용의 연기를 한 사실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케나카는 ‘추문 올림픽’으로까지 불리는 도쿄올림픽 ‘사임 릴레이’의 마지막 주자였다. 올해 2월 모리 요시로(森喜朗)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전 회장이 “여자가 있는 회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내용의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러난 후, 관계자들의 과거 언동 발각→사임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3월에는 개·폐회식 총괄책임을 맡은 사사키 히로시(佐々木宏) 프로듀서가 여성 개그맨을 돼지로 분장시켜 무대에 올리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실이 알려져 사퇴했다.

글로벌 아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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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 직전인 19일엔 개회식의 음악감독 오야마다 게이고(小山田圭吾)가 학창 시절 장애인 동급생에게 인분을 먹이고 폭력을 가한 사실로 비난을 받아 물러났고, 22일엔 과거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개그 소재로 삼은 연출자 고바야시 겐타로(小林賢太郞)가 해임됐다. 그 사이 올림픽 문화행사에 참가할 예정이던 유명 그림책 작가 노부미가 학창시절 교사를 괴롭히고 협박한 이력이 문제가 돼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하나하나 별도의 사례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다. 여성·장애인·타민족 등 나와는 다른 존재, 약자에 대한 혐오다. 사임·해임의 변은 똑같았다. “평등과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다.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 보였던 일본 사회에 이 정도로 차별과 혐오가 일상화돼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 일주일 남은 도쿄올림픽은 일본에 무엇을 남길까. 올림픽 기간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무섭게 확산해 선수들이 돌아간 후에도 후유증은 이어질 것이다. 한편으론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한 선수들의 노력으로 ‘역대 최다’ 메달을 획득한 기쁨과 자부심이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올림픽이라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통과하며 일본의 뒤처진 현재가 비로소 드러났다는 게 가장 중요한 성과 아닐까. 금메달의 환희도 코로나19의 혼란도 언젠간 끝날 테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은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아가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올림픽은 일본에 ‘행운’이었다고, 언젠가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