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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틀린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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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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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단짝 친구는 국가대표를 꿈꾸던 운동부 학생이었다. 새벽 훈련을 마치고 등교했던 그는 아침마다 선배나 코치에게 그날 맞은 일을 마치 무용담처럼 들려주곤 했다. 남이 알세라 교복 치마가 가려주는 허벅지 위쪽과 엉덩이를 하키채 등으로 맞았다. 그때 나는 “운동하면 원래 다 그래”라는 친구 말을 별다른 의심 없이 믿었다.

국가대표 출신 운동선수 A와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체육계 폭력 관련 대화를 나눌 때다. ‘그땐 다들 맞으면서 운동했다’는 내게 A는 단호하게 말했다. “폭력이 심했던 시기는 맞는데 다들 잘못인 걸 알고 있었어요. 저는 맞을 때마다 거세게 항의했거든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A의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운동하는 친구들에게 가해지는 각종 폭력은 문제 삼을 틈도 없이 그저 당연한 건 줄 알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내 고백에 A는 “다 그런 건 없다. 폭력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 ‘4등’에서 수영 코치(박해준 분)가 훈련 중 제자 준호(유재상 분)를 빗자루로 때리고 있다. [사진 영화 ‘4등’]

영화 ‘4등’에서 수영 코치(박해준 분)가 훈련 중 제자 준호(유재상 분)를 빗자루로 때리고 있다. [사진 영화 ‘4등’]

하지만 체육계 폭력 문제에서는 원인을 유독 피해자에게서 찾는 분위기다. “너만 잘하면 맞을 일 없다”는 논리다. 스포츠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4등’(2016)의 주인공 열두 살 준호. ‘만년 4등’인 아들을 보다 못한 엄마는 “아이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폭력적인 코치를 아들에게 붙인다. 영화 속 어른들은 “맞는 거보다 4등이 더 무섭다” “맞을만한 이유가 있으니 때린 것 아니냐”며 폭력을 묵인한다.

이처럼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폭력은 필요한 도구로 인식된다. 체육계에 만연한 성적 지상주의가 폭력이라는 수렁으로 이끄는 셈이다. 코치는 준호를 때린 후 말한다. “이거 다 너를 위해서야.”

정말 선수를 위한 일이었을까. 내 친구는 고된 훈련을 참지 못하고 고등학생 때 운동을 접었다. 국제대회에서 숱한 메달을 따며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한 A에게도 아름다운 기억만 남은 것은 아니다.

“훈련 끝나고 집에 와 잠이 들면 엄마가 옷을 슬쩍 들어보곤 하셨대요. 몸에 멍이 들었는지를 확인했던 거예요. 청춘을 다 바쳐서 운동한 대가치고 너무 잔혹한 기억 같아요. 요즘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최근 체육계를 넘어 사회 각계로 퍼지는 ‘폭력 미투’는 그동안 끊이지 않았던 폭력의 문제를 드러내고, 사회 구성원들이 이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바닥은 원래 다 그런 거다” “너(팀)를 위해서다”라는 궁색한 변명이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바뀐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