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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삼국지 채색한 아들…"비열하게 살아남은 조조, 요즘 정치판 비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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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화백의 차남인 고성언 실장을 26일 경기도 김포 고우영 화실에서 만났다. 그의 왼쪽부터 고 화백이 생전 그린 자화상, 오른쪽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고 화백이 자신과 닮은꼴로 즐겨 비교한 유비 캐릭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우영 화백의 차남인 고성언 실장을 26일 경기도 김포 고우영 화실에서 만났다. 그의 왼쪽부터 고 화백이 생전 그린 자화상, 오른쪽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고 화백이 자신과 닮은꼴로 즐겨 비교한 유비 캐릭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버지 『삼국지』에선 조조가 비교적 멋진 리더로 그려졌지만, 그런 조조도 적벽에서 관우한테 죽을 뻔했을 때 관우의 사람됨에 하소연해서 비열하게 살아남잖아요. 요즘 정치판하고 엇비슷하지 않나.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어릴 적 본 『삼국지』와 느낌이 달랐죠.”
고우영(1938~2005) 화백의 대표작 『삼국지』(연재 1978~80)를 43년 만에 처음 채색 판으로 펴낸 아들 고성언(52, 고우영 화실 실장)씨의 말이다. 지난 15일 10권 분량 종이책으로 나온 이번 올컬러 완전판(문학동네)은 아버지 생전 그림 작업을 도왔던 그가 직접 흑백 펜화 원고를 디지털 스캔해 색을 입혔다.
26일 경기도 김포 ‘고우영 화실’에서 만난 그는 “색깔만 입혔을 뿐이지 스토리는 토씨 하나 안 바뀌었다”면서 “채색하며 다시 보니 스토리 깊이가 옛날에 읽을 때랑 다르더라. 인물들의 마음을 시대상과 각자 나이대, 현생활에 자꾸 밀접시켜 돌아보게 만든다”고 했다.

연재 43년만에 『고우영 삼국지』 컬러판 출간 #생전 수채화 표지 토대 아들 고성언씨가 채색 #70년대 검열로 훼손, 2002년 흑백 완전판 #"다시 보니 깊이 달라…요즘 정치판 닮았죠"

제갈량은 그림톤 단순…장비·관우·조조 까다로워

지난 15일 올컬러 완전판으로 출간된 『고우영 삼국지』(전 10권). 표지의 제갈량 그림은 고우영 화백이 생전 수채화로 직접 채색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아들 고성언 실장이 내지까지 모두 채색을 입혀 복간했다. [사진 문학동네]

지난 15일 올컬러 완전판으로 출간된 『고우영 삼국지』(전 10권). 표지의 제갈량 그림은 고우영 화백이 생전 수채화로 직접 채색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아들 고성언 실장이 내지까지 모두 채색을 입혀 복간했다. [사진 문학동네]

채색하며 신경 쓴 부분은.  

“기본적으로 너무 화려하지 않게. 아버지가 생전 표지 그림을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하셨는데 투구·망토 같은 의상 색깔은 아버지의 오리지널과 비슷하게 했다.”

채색 작업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은.  

“제갈량. 톤이 단순하다. 얼굴도 옷도 하얘서 그림자만 살짝 넣어주면 됐다.(웃음) 장비·관우·조조는 이 색, 저 색 스토리에 맞게 신경 써야 해서 까다로웠다.”

『고우영 삼국지』가 다른 『삼국지』와 차별화된 점은.  

“창피한 얘기지만 다른 『삼국지』는 맛보기로 몇 페이지 읽은 게 전부다. 전투할 때 주로 웅장한 느낌인데, 아버지 건 그보다 만화 같은 상상이 많다. 집단학살 같은 걸 수류탄으로 한 방에 끝내고. 그 당시 수류탄이 어딨겠나. 탱크 나와서 빵빵 쏘고. 그런 대범함이 대단하다.”

고우영, 검열로 만신창이됐던 초판본 '앵벌이' 빗대 

2003년 생전 고우영 화백이 자신이 그리고 채색한 대표작 캐릭터들과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2003년 생전 고우영 화백이 자신이 그리고 채색한 대표작 캐릭터들과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1978년부터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고우영 삼국지』는 권력가들의 권모술수를 꼬집은 풍자와 해학, UFO·서부극 등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패러디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나온 단행본(우석출판사)은 검열 과정에서 폭력·선정성 이유로 100여 페이지가 삭제·수정돼 총 10권 분량이 절반 가까이 잘려나갔다. 24년이 지난 2002년에야 무삭제 완전판이 나왔을 때 고 화백은 “아이는 당시 군용트럭 비슷한 것에 깔려 팔 다리 몸통이 갈가리 찢기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중략) 그 불구가 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줄 엄두를 못 내고 24세의 청년이 되기까지 길거리에서 앵벌이를 시켰다”고 작가의 말에 털어놨다.

고우영 화백에게 『삼국지』가 당대를 풍자하는 역사적 지도였다면 아들 고성언 실장에게 『삼국지』는 아버지 그 자체였다. “모든 인물에 아버지가 다 있어요. 장비가 험한 말 할 땐 아버지 말투랑 똑같고. 관우의 엄숙함도 아버지죠. 제일 닮은 건 유비죠. 아버지 결혼하실 때 저희 외할아버지도 ‘자네는 유비일세’ 하셨대요.”

고우영 화백의 그림. 맨 왼쪽의 '삼국지' 관우는 고 화백이 생전 자신의 이름과 '우(羽)'자가 같다는 걸 자랑스레 강조하곤 했다. [사진 고우영]

고우영 화백의 그림. 맨 왼쪽의 '삼국지' 관우는 고 화백이 생전 자신의 이름과 '우(羽)'자가 같다는 걸 자랑스레 강조하곤 했다. [사진 고우영]

어떤 아버지였나.  

“저희 사남매한테 항상 자상하셨다. 자기 할 건 하라는 무언의 압력은 분명 있었지만.(웃음) 집안 분위기 메이커라 해야 하나, 지인들 사이에도 수준 높은 유머로 통했다.”

고 화백은 관찰자의 자세가 철저했다. 90년대 왼쪽 눈이 실명 위기에 처했을 때도 핏줄이 터진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다. 늘 유쾌한 태도였다.
고 실장은 “아버지가 골프를 치셨는데 (왼쪽 눈 탓에) 거리조절이 안 돼서 스코어가 엉망이었을 때도 퍼팅이 딱 들어가면 ‘일목요연(一目瞭然)’이라 농담하셨다”고 돌이켰다.

왼쪽 페이지가 고우영 화백이 핏줄이 터진 왼쪽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1주기 전시회 도록에 실은 것을 고성언 실장이 직접 보여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왼쪽 페이지가 고우영 화백이 핏줄이 터진 왼쪽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1주기 전시회 도록에 실은 것을 고성언 실장이 직접 보여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버지 최고작은 『삼국지』『일지매』아닌 이 만화

사남매는 아버지의 예술감각을 물려받아 모두 예대를 나왔다. 고 화백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이가 셋째인 고 실장이다. “저는 기억도 안 나는 아기 땐데, 아버지 말씀이, 집에서 일간지 연재 마감을 하는데 제가 신기해서 옆에서 보며 까불다가 귀중한 원고에 잉크를 쭉 엎었대요. 말도 잘 모를 때부터 연필 잡고 끄적끄적했다더군요. 고등학교 때부턴 용돈 벌겠다고 아버지 옆에서 붓에 먹을 찍어서 배경 작업을 도와드리기도 했어요.”
“어려서부터 그림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자연스럽게 미술을 했다”는 그다. “제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할 때도 데생이나 채색 그림 가져가면 아버지는 자신과는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셨는지 이래라저래라 말씀 없이 잘했다고만 하셨다”고 돌이켰다. “외모도 제가 제일 닮았고 아버지 봤을 땐 항상 숫기 없고 어설픈 뭔가 좀 모자란 아들이었겠죠. 그래서 더 애착이랄까, 더 도와주지 못해 아쉬워하셨어요.”
2002년 미국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던 그는 아버지의 암 발병 소식에 귀국해 병수발과 바깥업무를 자처했다. 가족을 대표해 ‘고우영 화실 실장’이라 불린 세월이 어느덧 20년. 그도 딸 셋을 둔 아버지가 됐다. 첫손에 꼽는 아버지 작품으론 『삼국지』도, 『일지매』도 아닌 이 만화를 들었다.

고우영 화백이 가족의 일상을 그린 만화. 왼쪽 페이지 위쪽 그림은 고 화백이 아내의 처녀시절부터 결혼 후까지 변천사를 익살스레 표현한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우영 화백이 가족의 일상을 그린 만화. 왼쪽 페이지 위쪽 그림은 고 화백이 아내의 처녀시절부터 결혼 후까지 변천사를 익살스레 표현한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족에 대한 만화를 그린 적이 있으세요. 짤막짤막한 에피소드에 일상생활을 담은 것인데 저는 그 만화를 제일 좋아해요. 1·4 후퇴 때 용기 없던 자신을 표현한 일화부터 어머니 처음 만날 때 창피해서 마음 속인 기억까지. 과장된 이야기도 없고 잔잔하죠. 원본을 못 찾아서 일부만 아버지 1주기 추모전 때 도록에 수록했죠.”

70년대 연재 『수호지』 무삭제판도 복간 작업

그는 지금도 “매년 말일이나, 1월 1일 사무실에 나와 아버지한테 ‘올 한 해도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도한다. 항상 옆에 계신 것 같다”면서 “저도 이제 가정을 갖고 생활하다 보니 삶이 어렵고 답 없고 막힐 때 아버지가 계셨다면 ‘이럴 땐 어떻게 할까요’ 이러면 ‘야 니 맘대로 해’ 말하셔도 어쨌든 그 한마디에 위안이나 답을 얻을 텐데, 그게 제일 아쉽다”고 했다. “너무 빨리 가신 것 같아요. 요즘 60대 중반, 너무 아까운 나이잖아요.”

고우영 화실에 보관된 『수호지』 원고 원본. 무삭제판 복간을 위해 편집 작업 중이라고 고성언 실장은 귀띔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우영 화실에 보관된 『수호지』 원고 원본. 무삭제판 복간을 위해 편집 작업 중이라고 고성언 실장은 귀띔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 화백이 2005년 대장암 재발로 세상을 떠난 후로 ‘고우영 박물관’을 꿈꿔온 그는 “당시 추모전부터 세간에 오르내리니까 금방 될 줄 알았는데 만만찮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다 때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채색판 출간에 대해 “아버지에 대한 이 관심이 오래갔으면 좋겠지만 금방 또 이런 일은 언제 있었냐, 싶게 조용해질 것”이라면서도 “그래도 40년 넘게 된 책(『고우영 삼국지』)이 아직까지 시장에 나오는 게 흔치 않은 생명력이다. 작가의 역량이다. 돌아가신지 15년 된 분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게 대단하다”고 뿌듯해했다. 70년대 연재된 『수호지』도 무삭제판으로 복간 작업 중이라면서다.
“『일지매』 『임꺽정』도 그렇고 아버지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나 충돌을 아주 세심하게 잘 다루셨던 것 같아요. 저도 내 마음을 담은 그림을 그리려고 요즘 노력하는데 아직 멀었죠. 아버지처럼 더 많이 그려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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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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