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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없는 거여 ‘갈등 입법’ 쏟아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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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74석의 힘은 수적 우위보다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21대 국회 첫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인 9일, 더불어민주당은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 쟁점 법안들을 처리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 민주당 우군인 시민단체 등이 요구해 온, 그러나 재계와 학계 등에선 찬반 논쟁이 뜨거운 법안들은 거대 여당의 뜻대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제사법위원회 등 국회 상임위 단계에서 여당의 강행 처리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103석의 제1야당 국민의힘은 하릴없이 반대 버튼을 누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규제 3법, 5·18특별법, 노조법… #100개 법안 본회의서 무더기 처리 #재계·학계의 반대 목소리는 외면 #비토권 없앤 공수처법 오늘 강행 #국민의힘, 거여 독주에 속수무책 #필리버스터도 ‘잠깐멈춤’ 카드 그쳐 #“1인 시위…” 장외투쟁 가능성 시사 #정의당선 “경찰개혁 날림 입법”

경제계가 강하게 반발한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개정안)’,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위의 활동 기간을 1년6개월 연장하는 사회적참사진실규명법 개정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최대 징역 5년의 처벌을 가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안, 실업자의 노조가입을 허용한 노동조합법 개정안 등 쟁점 법안이 속속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날 본회의에서 100건의 법안이 처리됐다.

10일 이후 본회의 통과 예상 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일 이후 본회의 통과 예상 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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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갈등의 핵이었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은 이날 처리되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filibuster·무제한 토론)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삐라’에 대해 엄포를 놓은 직후 마련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등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 또한 ‘잠깐 멈춤’일 공산이 크다. 국회법에 따르면 필리버스터는 회기를 넘겨 진행할 수 없고,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안건은 다음 회기가 열리면 지체 없이 표결해야 한다. 민주당은 일찌감치 소집한 10일 임시국회에서 오후 2시 본회의를 열어 공수처법 개정안을 표결할 방침이다.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도, 국정원법 개정안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올해 안에 본회의를 통과할 것도 확실시된다. 민주당은 필리버스터를 24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정족수(재적 의원 5분의 3·180석)를 확보할 여력도 충분하다. 이날 필리버스터에 나선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국회는 거수기도, 통법부도, 자동판매기도 아니다”고 민주당을 겨냥했다. 김 의원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생산적 국회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청와대와 합작해 짓밟고 있어 헌법이 유린당하고 국민이 개나 돼지 취급을 받고 법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야당 “의회 파괴 정점엔 대통령”…쟁점법안 3개만 필리버스터 

이어 “저는 이 순간 헌법 제1조를 이렇게 읊어야겠다. ‘대한민국은 문(文)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문님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문빠들로부터 나온다’”고 비판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본회의에 앞서 “내일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논의해야 한다. 전국에서 1인 시위를 한다든지…”라며 장외투쟁 가능성을 시사했다.

9일 본회의 통과 주요 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9일 본회의 통과 주요 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청와대를 겨냥했다. 본회의 전 의원총회에선 “어제의 참담한 날치기, 입법 사기로 대표되는 법치·민주주의·의회주의 파괴의 정점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다”고 외쳤다. 그는 “이 사태가 문 대통령의 공수처법 통과를 바란다는 ‘오더’에 따라 착착 군사작전 하듯 진행되고, 이렇게 공수처를 무리하게 안하무인으로 밀어붙이는 이유는 문 대통령이 책임질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야가 합의하기는 했지만, 경찰청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야당의 공수처장 비토권이 삭제된 공수처법과 마찬가지로 경찰청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또 하나의 권력기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이날 반대 토론에서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 의지를 믿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 비대해진 경찰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할 장치가 들어 있지 않다”면서 “권력기관 개혁 완수라는 속도전에 밀려 이 같은 중차대한 경찰개혁 입법이 날림으로 처리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일었던 5·18 특별법도 이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처벌 조항이 핵심이다. 사회적참사법이 통과되면서 10일 종료 예정이던 사회적참사위원회(사참위) 활동 기한도 2022년 6월까지 1년6개월 연장된다. 사참위는 세월호 참사, 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 중인 조직이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지지층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법안이지만, 야당으로서는 ‘편 가르기 프레임’을 우려해 함부로 반대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고 말했다.

공수처법 개정안에 도입된 검사의 임용 요건 완화(변호사 자격 보유기간 10년→7년, 재판·수사·조사 경력 요건 삭제) 조항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은 검사 경력이 없는 친여 성향의 변호사들로 공수처를 구성하려는 의도라고 보고 반발하고 있다.

국정원법 개정안은 ▶대공·대정부전복 등 국내 보안정보 수집·작성·배포를 국정원 직무 범위에서 제외하고 ▶국정원의 수사권을 폐지하되 3년 유예하는 게 골자다. 폐지된 대공수사권은 경찰로 이관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은 국가경찰의 권한 비대화, 대공수사 기능 약화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남북관계발전법 역시 국민의힘이 “김여정 하명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는 법안이다. 대북전단을 살포하거나 확성기로 방송을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는 처벌 조항이 핵심이다.

거여의 입법 폭주와 관련,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최근 협치나 합리적 국정운영을 요구하는 중도층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폭락했지만, 오히려 전통적 지지층에선 입법과제를 다 처리했다는 이유로 결집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영익·김기정·하준호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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