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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은 총리 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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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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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정상 간 케미스트리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난 8일 회견에서 나온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말이다. 외교가 약점으로 꼽히는 스가는 “미·일 정상간 전화통화 37번 중 딱 한 번을 빼고 모두 배석했다. 한국, 중국, 러시아 문제도 다 보고를 받아왔다”면서 외교능력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어필해왔다. 그런데도 “못 미덥다”는 투의 기자 질문에 스가는 날을 세운 것이다.

‘케미스트리’란 아베 총리를 의식한 단어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고 햄버거를 먹으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는 모습을 스가 총리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방장관이라는 직책의 특성상 스가는 지난 7년 9개월 동안 외유를 한 적이 없다. 지난해 봄 납북자 문제 협력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게 유일하다.

스가가 외교 분야에서 역할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가 힐러리 당선을 낙관할 때, 스가는 트럼프계 인사를 만나 미리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 체결 때 “미국을 증인으로 세워야 한다”며 미국의 환영성명을 이끌어낸 것도 스가의 작품이었다.

글로벌 아이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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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는 주요국 대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오찬을 하는 등 외교사절들과도 폭넓은 접점을 유지해 왔다. 주일대사를 지낸 한 인사는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삼계탕을 먹은 이야기를 하는 등 한국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대한 감정이 급속도로 악화된 건 위안부 합의가 백지화 위기에 놓이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계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은 “위안부 합의 논란으로 한국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난 상태”라고 말했다. 아베 정권에서 오랫동안 총리관저를 출입했던 한 중앙 언론사의 데스크는 “오프 더 레코드를 포함해, 한국에 대해 언급한 기억이 없다”고도 했다. 한국이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얘기다.

퇴임하는 아베가 외교 분야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상왕 설’에 대해 스가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베에게 정부나 당의 직책을 맡길 생각이 없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권좌에 오르자마자 힘을 나눌 생각이 없어 보인다.

스가와 자주 접촉했던 한 인사는 “관방장관은 정부 대변인, 행정안전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을 겸한 자리”라면서 “성장과정, 정치경력을 비춰볼 때 아주 내공이 꽉 찬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7년 9개월만에 일본 총리 교체를 앞두고 한일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새 총리의 임기는 1년이지만 그 이상을 보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