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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5·18 트라우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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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입술이 두꺼운 윤리선생님은 표정이 무거웠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1996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러분과 같은 고등학생 무렵이었다”로 시작한 수업은 “총소리가 또렷해지는 밤에는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작은 방에 숨어 지냈다”를 거쳐 “해가 중천인데도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로 끝났다. 기억이 희미해진 탓에 그의 말은 줄거리만 남았지만 교탁을 움켜쥐고 얘기하던 모습은 한장의 사진처럼 또렷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박혔다.

그가 왜 16년 전 ‘5·18’의 어두운 기억을 꺼냈는지에 대해선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도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싶었을 거다. 먹고 살기 딱 적당한 호황이 찾아온 그 무렵은 모든 게 흐릿하던 시절이었다. 95년 12월 5·18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타인의 아픈 기억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5월이 찾아오면 그가 생각나는 건 가까운 누군가가 계엄군의 총에 사망했다는 고백 때문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5·6차 교육과정을 반영한 교과서는 5·18을 단 몇 줄로 설명했을 뿐이었다. 희생자 통계도 사건이 발생한 날짜도 없었다. ‘민주주의 헌정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진압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도 살상돼 큰 충격을 안겨줬다’는 건조한 단어로 나열한 문장이 교과서에 기록된 게 전부였다.

24년 전 교탁 앞에 선 그는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눈물도 없었다. 차곡차곡 쌓아둔 날것 그대로를 꺼내 들려줬을 뿐이지만 상당한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실은 꺼내 드는 것만으로도 큰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도 그게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을 거다. 그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을까.

다시 5월이다. 그동안 몇 개의 법이 신설됐고 몇 명의 대통령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진실과 거짓은 40주년이 된 올해도 충돌했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치장한 거짓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맞은 편엔 체념과 슬픔이 쌓인 진실이 서 있다. 과거를 부정하려는 거짓의 탐욕을 멈춰 세울 국민적 합의를 찾아 나설 때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