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부실투성이 공시 가격이 무너뜨린 조세 신뢰 바로잡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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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세금은 단돈 1원도 정확해야 한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세금이라는 이유는 뭔가. 투명하고 정당하게 매기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과속 위반으로 과태료가 나와도 대다수 시민은 군말 없이 납부한다.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민의식은 행정이 공정하다는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가 가장 두터워야 할 분야가 조세다.

부동산 공시 가격 계산이 주먹구구 #투명하고 엄정하게 형평성 높여야

이런 점에서 지난해 개별 주택 공시 가격이 부실하게 산정됐다는 소식은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믿었던 세금이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계산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제 나온 ‘부동산 가격 공시 제도 운용 실태’ 감사원 보고서를 통해서다. 이에 따르면 땅값·집값을 합한 개별 주택 공시 가격보다 땅값만 산정한 개별 공시지가가 더 높은 경우가 전국 22만8475가구에 달했다. 집값이 마이너스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땅값만 계산한 가격이 땅값과 집값을 합한 가격보다 더 비쌀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던 이 문제는 지난해 2월 시세보다 공시 가격이 너무 낮다는 취지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공익감사를 청구하면서 드러났다. 감사원이 들여다봤더니 문제투성이였다. 개별 주택 가격과 개별 공시지가를 산정하는 부서와 방식이 달랐고, 토지와 주택 공시 가격을 결정하는 기초가 되는 표준부동산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에도 표본 수가 달라 오차가 발생했다. 결정적 오류는 표준부동산 표본에 용도지역을 배제했다는 점이다. 토지의 용도가 부동산 가격을 좌우하는데 이것을 빼고 계산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파트·빌라 등 전국 공동주택 1400만 가구는 이번 감사에 포함하지도 않았다. 주먹구구로 계산한 공시 가격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공시 가격은 재산세뿐 아니라 건강보험료 등 60개 세금·부담금의 산정 근거로 쓰인다. 이러니 공시 가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국민이 늘어나고 불복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올해 3월 발표된 공동주택 공시 가격에 대해 3만7000여 건의 이의제기가 신청됐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도 조속히 검증이 필요하다.

국민 대다수는 평생 모아 노후에 보낼 집 한 채를 마련한다. 그런데 세금이 급등하는 데다 주먹구구로 계산됐다면 조세 제도를 신뢰하고 세금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지난해 주택 공시 가격에 대한 이의신청이 1년 전보다 10배나 늘었다는 것은 조세 불신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의신청이 늘어나는 것은 경제 질서 유지에도 좋지 않다. 부동산 과세는 더구나 중앙·지방이 따로 과세하는 이중체계여서 더욱 엄정하게 관리해야 분쟁의 소지가 줄어든다. 가뜩이나 부동산 세금이 급격히 오르고 있는 와중에 이런 소식을 접한 재산세 납부자들은 얼마나 놀랐겠나. 조세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조세 저항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즉각 조세 제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다행히 감사원이 이번에 잘못된 부분을 잡아내면서 구멍이 뚫린 조세 신뢰를 회복할 계기가 만들어졌다. 감사원은 “전국 사유지 43만여 필지는 개별 공시지가 공시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개선을 요구했다. 개별 공시지가가 산정된 토지와 미산정된 토지 사이에 과세 형평성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정부는 신속한 수정 조치로 조세의 형평성과 신뢰를 회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