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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177석 거대 여당의 ‘한명숙 재심’ 무리수를 경계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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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법원에서 9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았던 한명숙(76) 전 총리의 정치적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집권 여당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치가 사법에 개입해 범법자를 양심수로 둔갑시킨다면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 총리를 지내 ‘친노 대모’로 불리는 한 전 총리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미 2017년에 끝났다. 한 전 총리는 2007년 당시 한만호(2018년 만기 출소 사망)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달러와 수표를 포함해 모두 9억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2010년 7월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에서 자금 전달 사실을 인정했던 한 전 대표가 1심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바람에 1심은 무죄였다. 하지만 ‘한만호 비망록’ 등 각종 증거가 인정돼 2심에서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3000만원을 선고받았고, 2017년 5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대법원에서 9억원 수수를 놓고 6억원에 대해서는 유죄 8명과 무죄 5명으로 판단이 갈렸지만, 수표로 건네진 1억원을 포함해 3억원에 대해서는 대법관 13명 전원이 유죄로 인정했다. 특히 한 전 대표가 전달한 1억원짜리 수표를 한 전 총리의 동생이 전세 자금으로 쓴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데 지난 14일 친정부 성향의 인터넷 매체가 한만호 옥중 비망록을 입수했다며 보도하자 여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한 전 총리는 강압수사와 사법 농단의 피해자”라고 단정했다. 심지어 박주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설치되면 수사 범위에 들어가는 건 맞다”는 말까지 했다. 여권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면 ‘한명숙 구하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지휘하는 듯하다.

물론 법적 요건을 갖추면 한 전 총리 본인이 재심을 청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만호 비망록은 이미 1, 2, 3심에서 법원 판단이 끝난 사안이라 재심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 분석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증거 위조·변조, 위증 등이 증명된 때로 재심 사유를 엄격히 제한한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확정된 재판이 잘못됐다고 (명백한 증거도 없는데 정치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사법 불신의 큰 요인이 된다”고 우려했다. 여당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여당은 177석의 힘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으로 검찰과 법원을 압박하기 위해 무리하게 한명숙 재심 카드를 휘두를 경우 여론의 강한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