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방지법, n번방 못막는다' 방통위의 뜻하지 않은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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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서현 기자

지난 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출석해 n번방 방지법안 질의에 응답한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과 한상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사진 연합뉴스

‘무해한 법’이라고 해명하려다가, ‘무용한 법’임을 고백해 버렸다. 지난 1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기업들 질의에 내놓은 답변은 ‘n번방 방지법은 n번방 사건을 못 막는다’는 실토와 같았다.

[현장에서]

n번방 방지법은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대책으로 나온 정보통신망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다. 지난달 통과된 또 다른 ‘n번방 방지법’(성범죄자 처벌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처벌법 개정안)과는 별개 법안이다.

포털·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게임·동영상 업체 등 부가통신사업자가 '성범죄물 유통을 방지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며, 사업을 폐지할 수도 있다. 지난달 방통위가 내놓은 ‘디지털 성범죄 방지 대책’과 같은 내용이다. 법안은 지난 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전체회의를 통과했고,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면 오는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그 조치는 대체 뭔가요’

하지만 성범죄물 유통을 막는 ‘기술적·관리적 조치’가 무엇인지, 법안만 봐선 알 수가 없다. ‘네이버 비공개 카페나 카카오톡 대화를 검열하라는 거냐’는 우려와 반발이 쏟아지는 이유다. 급기야 한국인터넷기업협회·벤처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방통위에 ‘그 조치가 대체 뭔가요’라 물었고 방통위가 답했다. 그런데 답변 내용에 따르면 ‘n번방 방지법’은 n번방 사건을 막을 수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n번방 방지법, 왜 n번방 못 막나

첫째, n번방 같은 비밀 채팅에 적용 안 된다. 방통위는 답변서에 ‘사업자의 유통 방지 의무는 일반에 공개되는 정보에만 해당하며 사적 대화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텔레그램도 사적 대화고, n번방은 일반이 아닌 ‘돈 낸 이’에게만 공개됐다. 인터넷 기업들이 ‘사적 검열이 아니라 다행’이라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이유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문했다. “텔레그램에 적용 안 되는데 이게 왜 n번방 방지법이죠?”

둘째, 성범죄물 초기 유출을 막을 수 없다. 방통위는 활용하려는 기술적 조치로 'DNA DB’(불법촬영물을 쉽게 검색해 내기 위해 불법촬영물로 인정된 콘텐트의 특징값을 저장해놓은 데이터 베이스)를 언급했다. 기존에 신고된 성범죄물이 재유통될 때 찾아내는 기술이다. 기술 자체가 이미 적발된 영상의 재유포를 막는 것이지, 텔레그램 n번방같이 피해자를 착취해 새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셋째, 방통위가 언급한 다른 조치는 국내 업체가 이미 하고 있다. 방통위는 답변서에 “불법촬영물 신고 기능, 검색 제한, 경고문구 발송 등”이라고 적었다. 이미 자율규제로 국내 업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조치다.

넷째, 해외사업자에 실효성이 없다. 해외 기업에도 법을 적용한다는 ‘역외적용’ 규정을 법에 넣는다 해도, 텔레그램 같이 본사 위치도 모르는 해외 업체에 실효성이 없음은 방통위원장도 국회에 나와 인정한 바다. "국내 업체만 적용받는 역차별 규제 아니냐"는 질문에 방통위는 “향후 수사기관, 해외기관 등과 협조해 규제가 집행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했다.

지난 12일 인터넷기업협회 등은 n번방 방지법 등을 졸속 처리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김정민 기자

국회, 알고도 ‘면피성’ 통과

이런 문제를, 국회 과방위 의원들도 모르지 않았다. 지난 7일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은 “해외 사업자에 실효성이 없다”(이상민, 더불어민주), “국내 기업 역차별 우려”(박대출, 미래통합), “법적 명확성이 없다”(이종걸, 더불어민주)며 매섭게 지적했다. 그러고는, 법을 통과시켰다. 가히 영화 ‘식스 센스’ 급 반전이었다.

‘반전극’을 예고하는 복선은 깔려 있었다. 회의 말미 변재일(더불어민주) 의원이 말했다. “n번방 관련해서는 우선 법을 빨리 통과시키는 게 중요하다. 국회가 여기 대해서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냐 이런 게 중요하기 때문에.” 에둘러 말했지만 ‘아무것도 안했다는 말 듣지 않게 면피하자’는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자 의원들은 법안 일부만 손을 봐 통과시켰다.

규제는 악이 아니며, 기업은 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방통위와 국회 과방위는 시작도 안 된 ‘n번방 방지법’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심서현 산업기획팀 기자 shsh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