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서 전략폭격기 뺀 미국, 또다시 고조되는 확장억제 약화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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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괌 앤더슨 공군 기지에서 폭격기의 순환 배치를 끝내겠다고 밝히면서 미국의 '확장 억제'가 약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확장 억제'는 미국이 동맹국을 대상으로 핵억제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다. 일명 ‘핵우산’이다.

국방부, "미국의 핵우산 변함 없다" 강조 #폭격기 철수는 확장억제 담보 사라지는 셈 #방위비 분담금 협상 연계 의도 시각도

지난 13일(현지시간) 괌 앤더슨 공군 기지에서 미국 공군 전략폭격기인 B-52 스트래토포트리스 5대가 활주로에서 이륙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날 비행은 고별 행진 성격이었다. [사진 미 전략사령부]

지난 13일(현지시간) 괌 앤더슨 공군 기지에서 미국 공군 전략폭격기인 B-52 스트래토포트리스 5대가 활주로에서 이륙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날 비행은 고별 행진 성격이었다. [사진 미 전략사령부]

발단은 지난 16일 미국의 전략폭격기인 B-52H 5대가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미 본토 노스다코타주 미놋 공군기지로 이동하면서다.

미 전략사령부 대변인인 케이트 아타나소프 소령은 “폭격기는 미 본토에 영구 주둔하지만, 필요할 때 인도ㆍ태평양 지역에 전진 배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당국자도 20일 “이번 조치로 미국의 확장 억제는 변함이 없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군사 전략 전반을 점검한 국방전략서(NDS)와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에 따라 이뤄진 조치”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2004년부터 괌에 B-52를 비롯한 B-1, B-2 등 폭격기를 6개월 주기로 순환 배치했다. B-2와 B-52는 핵폭격이 가능한 전략폭격기다. 미 공군에선 이 같은 순환 배치를 ‘폭격기 연속 주둔(CBP)’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핵전력은 전략폭격기ㆍ대륙간탄도미사일(ICBM)ㆍ전략잠수함 등으로 이뤄진다. 국방부의 설명에 따르면 미 본토에서 ICBM을 쏘면 30분 안에 전 세계 어디라도 타격할 수 있다. 핵미사일을 실은 전략잠수함은 태평양에서 초계 중이다. 전략폭격기도 유사시 공중급유기의 도움을 받으면 미 본토에서 한반도로 출동할 수 있다.

또 다른 당국자는 “미국은 핵심 전력의 배치를 예측 불가능하도록 짧은 주기로 자주 이동하는 동적 전력 전개(DEF)를 추진하고 있다”며 “폭격기를 본토로 철수하는 것도 DEF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CBP는 미국 확장억제에 대한 담보의 성격을 가진다. 담보물(폭격기)이 사라지면서 인도ㆍ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방위 공약이 흔들리게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미국은 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포기하고 핵심 이익이 걸린 상황에만 선택적으로 개입하는 ‘역외 균형’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며 “미국이 앞으로 동맹국에 더 큰 비용 분담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괌의 폭격기 철수를 현재 난항 중인 제11차 한ㆍ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협상과 연관을 짓는 시각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대형 폭격기가 괌에서 날아오는 데에는 7시간이나 걸리며, 수백만 달러의 폭탄을 투하하고 괌으로 돌아가는 데 수억 달러를 지출한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미국은 폭격기와 같은 전략자산 전개 계산서를 한국에 집요하게 내밀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지난해 2월 타결한 제10차 SMA 협상 때 미국 측은 ‘북한의 핵위기가 높아지면서 한국이 전략자산 전개를 자주 요청했다. 앞으론 전략자산 전개 비용을 펜타곤(미 국방부)에 송금(wire)하라’고 요구했다”고 소개했다.

이 소식통은 “우리 측이 ‘미군이 용병 노릇을 하려는 거냐’고 따지자 미국이 결국 포기했다”고 전했다. 12차 협상 과정에서도 미국은 ‘준비태세(Readiness)’라는 항목에 전략자산 전개 관련 비용을 슬쩍 얹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CBP 종료는 미국이 오래전부터 검토했던 사안이고, 한국에도 이를 미리 알려줬다”며 SMA 협상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홍규덕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이 폭격기를 본토로 보내 교착 상태인 대북 협상의 물꼬를 틀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B-1과 B-52가 한반도를 찾을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밖에 일각에선 미국이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파기한 뒤 저위력 전술 핵탄두와 중거리탄도미사일(3000~5500km)을 인도ㆍ태평양 지역에 배치해 폭격기의 전진 배치를 대신하려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철재ㆍ박용한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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