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 집행 속도전은 총선 겨냥 매표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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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예산 풀기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어제 “상반기 재정 조기 집행 목표를 역대 최고 수준인 62%로 설정하고 일자리 사업은 1분기 안에 37%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효과적인 재정 조기 집행은 마른 우물에 마중물 붓듯 경제 현장에 피를 돌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여당의 예산 조기 집행 계획은 그 규모와 내용에서 총선을 겨냥한 포퓰리즘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62% 집행 시기가 상반기라고는 하나 총선을 앞둔 1분기에 지출 계획이 집중돼 있다. 지난해처럼 또 적자 국채를 발행해 추경을 편성하면 된다는 계산인 건가.

조기 집행 내역에서 선심성 현금 살포가 주를 이루는 것도 문제다. 한겨울에 60세 이상 단기 일자리 사업으로 1조원을 쓰고, 설 전후에는 소상공인 중소기업 자금 지원과 만기 연장 등으로 90조원을 푼다. 근로·자녀 장려금 1200억원도 설 전에 풀고, 국민 생명 지키기 관련 예산의 81%도 1분기에 집행하기로 했다. 며칠 전 새해 첫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속도전’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총선 전 예산 배정과 집행을 강조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단 풀고 보자’는 식의 분위기에선 예산 집행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견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이월·불용 예산을 줄이고 지자체도 최대한 협조해 달라”고 당부한 뒤 당·정·청은 예산 집행 독려에 나서고 있다. 기재부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원활히 집행되도록 통상 10개월 이상 걸리는 공공기관 예비타당성 조사 기간을 7개월로 단축하기로 했다. 500억원 이상 드는 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게 돼 있지만 이미 현 정부 들어 예타 면제 사례가 크게 늘었다.

재정 확대로 경제 침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쓰는 효율적인 집행이 돼야 한다. 지난해 말 여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올 예산안에는 가뜩이나 선심성 현금 살포 성격의 복지 항목이 가득하다. 예산 512조원 중 복지 예산이 180조원이나 된다. 25조원이 넘는 대규모 일자리 예산이 잡혀 있지만 정부 정책이 노인용 단기 일자리만 늘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경기 악화로 세수가 줄어들면서 예산 마련을 위해 적자 국채 60조원을 발행할 판이다. 이런 마당에 총선용 매표(買票)라는 정권의 사(邪)까지 끼어선 나라 살림은 꼴이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