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판결문에 레깅스 몰카사진 첨부…무죄면 괜찮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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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수정 사회1팀 기자

이수정 사회1팀 기자

“같은 종류의 사건을 다루는 판사들이 다른 법원 판결을 찾아보잖아요. 그럴 때 참고용으로 첨부한 게 아닐까 합니다” 지난달 24일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동영상 촬영한 남성 A씨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논란이 일었다. 유·무죄에 대한 논쟁이 잦아들기도 전에 새로운 사실이 또 쟁점이 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A씨가 촬영한 동영상의 캡처 본을 판결문에 실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다.

“종종 있는 일인가요?” 아직은 몰래 촬영한 사진이 첨부된 판결문을 읽어본 적 없는 기자가 한 판사에게 물었다. 그는 “종종 이라고 까지는 사실…” 라며 말끝을 흐렸다. 판사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가 될 만큼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 대한 판결에서 문제가 된 사진이 판결문에 들어가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에서도 이번 판결문에 사진이 첨부된 것을 두고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논의들이 나왔다고 한다. 내부게시판에서 판사들은 ▶아직 법원 내부에 이런 문제에 대한 세부적인 규정이나 논의가 없었던 점 ▶2차 피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데 재판부가 사진을 첨부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젠더법연구회 소속 한 판사는 “무죄 선고와는 별개로 사진을 싣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감정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라 부적절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 원칙상 압수했던 압수물도 돌려주게 돼 있다”고 말했다. 남성 A씨가 불법 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촬영한 동영상 파일 등을 수사기관에 압수당했다가도 무죄 판결을 받은 이상 파일은 돌려줘야 하는데, 그 캡처 본을 판결문에 실었다고 해서 이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보는 취지다.

“글만 있는 판결문보다 직관적이지요. 같은 고민을 하는 판사들의 이해를 도울 수는 있으니까요.” 사진을 첨부한 재판부를 최대한 이해해보려 한다는 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같은 죄를 심리하며 유·무죄를 고심하는 판사들은 이번 판결문으로 작은 참고 자료를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을 실은 재판부의 의도 자체가 나빴다고, 전국 3000여명의 법관이 호기심에 해당 판결문을 열어볼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판결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사진을 첨부한 동료를 위한 ‘배려’가 피해자에 대한 배려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사진을 실은 항소심은 그 판결문에서 남성 A씨가 사진을 찍은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A씨의 이 사건 행위가 부적절하고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임은 분명하다”고 말이다. 이어 “불쾌감을 넘어 수치심을 느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불쾌감을 느껴 신고에까지 이른 피해자가 몰래 찍힌 자신의 뒷모습이 실린 판결문을 받아봤을 때 느낄 감정이야말로 불쾌감을 넘어서는 감정 아닐까. 무죄를 받은 피고인에게도, 불쾌감을 느낀 피해자에게도 판결문은 온다. 판결문이 판사들의 ‘참고용’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수정 사회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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