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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이름 옆에 1등부터 꼴등까지…인사 뒤흔드는 블루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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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야단법석(야단法석)'에서는 법조계의 각종 이슈와 트렌드를 중앙일보 법조팀 기자들의 시각으로 재조명합니다. '야단法석'을 통해 법조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세요.

"오너가 내 사람 쓰겠다는데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개별검사 행적 담은 인사 지침서 #인적사항, 부임 부서, 동기 평가 등 #법무부 검찰국서 차곡차곡 기록 #“주관적 평가로 검찰 서열화” 지적 #“2000명 관리 합리적 제도” 평가도

검찰 고위직 및 중간간부급 인사의 '공정성' 시비를 두고 한때 법무부 검찰국에서 인사 실무를 담당했던 A 변호사가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인사는 아무리 공정하게 해도 전체의 90%는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라며 "불만을 최대한 줄이는 게 인사의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정치권력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는 것은 모든 공직 인사의 숙제"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검사도 공무원인 만큼 정치권력의 인사 개입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들렸습니다.

검찰 인사 후폭풍…"해도 너무했다" 

Mobile_야단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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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행된 검찰 중간 간부급 이상 인사에 대한 후폭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지명 이후 70명 가까운 검사들이 옷을 벗었습니다.

물론 인사가 끝난 뒤 검사들이 대거 옷을 벗는 풍조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후배가 승진하면 선배들이 줄줄이 조직을 떠나는 검찰 조직 특성상, 매번 인사 뒤엔 수십명에 달하는 검사가 용퇴를 결심했습니다. 지난달 25일 취임한 윤석열 검찰총장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취임 인사차 지난 7일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선 "원래도 관례로 (검찰총장 임명 후 검찰 인사에서) 40~50명이 사표를 내곤 했다"며 "합리적인 인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검찰 안팎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좀 다릅니다. "해도 너무했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대개 특수통으로 대표되는 '윤석열 사단'의 약진, 그리고 살아있는 권력을 겨눴던 검사들의 좌천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큽니다.

검사에 대한 최종 인사권자는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검찰청법 제34조는 "검사의 임명과 보직은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한다. 이 경우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에 명시돼 있듯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그리고 대통령은 검사의 인사와 관련해 직·간접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 사람만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으로 인사가 진행되면 당연히 불공정 시비가 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개별검사 기록 총망라…검찰 '블루북'이란?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이 때문에 검찰 인사를 담당하는 법무부 검찰국은 개별검사에 대한 나름의 객관적인 기록을 차곡차곡 수집합니다.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업데이트가 이뤄진다고 합니다. 이 인사기록카드를 검찰 일각에선 '블루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 블루북(The Bluebook)은 미국 유명 대학의 로스쿨에서 법률 관련 저술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양식 지침서의 일종입니다. 이 책자의 표지가 파란색이어서 블루북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블루북이 제시하는 인용법을 상당수의 미국 법률 논문이 규범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검찰의 블루북 역시 검사 인사와 관련한 일종의 지침서입니다. 개별 검사의 임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행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죠. 여기엔 검사의 인적사항부터 지금껏 거쳐 온 부서 등을 정리한 보직 관리, 동기 및 선후배들의 평가가 총망라돼 있다고 합니다. 인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참고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장급 이상 중간간부급 검사의 블루북엔 함께 검사로 임관한 사법연수원 동기생 간의 서열이 숫자로 표시되기도 합니다.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보복을 했다는 혐의(직권남용)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검사장은 지난 4월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 인사 원칙은 성적 우수자 본인의 희망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라며 "서 검사는 동기 95명 중 91위였다"고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인사보복이 아닌, 원칙에 따른 인사였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예측된 검찰 인사…"인사 두 번이면 회생 불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블루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나름의 객관화 작업을 거쳤다곤 하지만, 주관적인 평가들이 모여 결국 검찰 내부의 서열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하지만 법무부 검찰국에서 인사 실무를 담당했던 B 검사는 다른 시각을 전했습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는 과열 경쟁을 부추긴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2000명이 넘는 검사를 관리하기 위해선 꽤 합리적인 제도"라는 겁니다.

다만 B 검사는 "블루북에 기초한 인사라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모순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블루북이란 원칙은 명분일 뿐 그보다 우선한 무언가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능력과 실적, 조직 내 신망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진다는 신뢰, 검사로서의 명예와 자긍심이 엷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검찰을 떠난 주진우 전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장검사의 사의 글에 검찰 안팎이 동요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이번 검찰 인사가 예측된 것이란 시각도 있습니다. 최근 검찰 인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2010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와의 대담집인『진보집권플랜』에서 검찰의 속성을 "보수적 세계관과 엘리트주의를 체현하고 공소권을 독점한 권력체"라 요약하며 "검사들이 검찰을 쪼갠다(검찰 개혁)고 반발하면 '너 나가라'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과 김인회 인하대 로스쿨 교수가 2011년 공동 집필한『검찰을 생각한다』엔 "아무리 강단 있는 검사라도 인사문제 앞에선 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검찰 간부는 해마다 보직인사를 받는데 연거푸 두 번만 한직으로 발령이 나면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인사권을 통해 검찰을 통제 및 장악해야 한다는 겁니다.

2003년 6월 사회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송광수 검찰총장, 강금실 법무부 장관(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2003년 6월 사회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송광수 검찰총장, 강금실 법무부 장관(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같은 현 정부의 인사 철학은 노무현 정부 당시의 경험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노무현 정부 역시 '검찰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방법은 달랐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을 통치에 활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검사 경력이 없는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검찰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습니다. 2003년 3월 정부 출범 이후 단행된 검찰 고위직 인사에서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장윤석 전 검사장은 서울고검 차장검사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자 "개혁을 위한 서열 파괴라는 미명 하에 선배를 후배 밑에 앉히는 것은 떠나라는 협박"이라며 "오늘 불명예스럽게 서울고검에 부임하고 사직하는 것은 스스로 물러서기보다 차라리 인사의 총탄에 맞아 죽어 나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공개 반발했습니다.

비 검찰 출신인 강 전 장관과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의 힘겨루기도 지속했습니다. 강 전 장관은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공수처)안과 중수부 폐지안을 두고 송광수 검찰총장이 반대 발언을 하자 대통령이 화를 내서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며 "인사권을 행사하고 검찰총장보다 장관이 힘이 세다는 것을 보여주니 검찰이 완전히 충성하기 시작했다"(『검찰을 생각한다』)고 술회했습니다.

"검찰이 다시 엉망진창이 되는 이유는 인사권을 청와대가 쥐고 있고 의도적으로 과거 방식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인사를 통해서 요직에 이런 사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검찰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다." 같은 책에 담긴 강 전 장관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가 머물렀던 노무현 정부와 지금의 청와대는 과연 같은 인사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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