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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행복한 여자, 꽃피우며 흙놀이 하는 정원이 있으니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22)

"어땠어?"
"완전 '어린 왕자'야. 옥상에 언니만의 우주를 만들어 놨더라고"
"그렇게 작아?"
"어"

책 『아침에 창문을 열면』. 김건숙씨는 이 그림책을 본 순간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싶지만 도쿄의 서민가는 창문을 열면 옆집 창문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창문을 여는 대신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버릇이 생겼다. [사진 양은심]

책 『아침에 창문을 열면』. 김건숙씨는 이 그림책을 본 순간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싶지만 도쿄의 서민가는 창문을 열면 옆집 창문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창문을 여는 대신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버릇이 생겼다. [사진 양은심]

우리 집 옥상정원을 보고 간 지인이 남편과 나눈 대화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어린 왕자』라고 하니 그녀다운 표현이지 싶다. 사진으로 보는 옥상정원은 실제 크기보다 두세 배는 더 넓어 보인다. 사진이 부리는 요술이다. 서너 걸음이면 끝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실제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옥상을 본 일본인과 한국인의 반응은 다르다. 특히 도쿄 23구에 사는 일본인은 좁다는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대부분 좁은 집에서 살기 때문이다. 집이 좁으니 옥상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한국인인 경우, 정원 혹은 옥상이라면 넓은 공간을 상상하기 때문인지 우선 '좁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말한다. "사진에서는 엄청 넓게 보였는데"라고. 그러니까 사진이 부리는 요술이라니까.

'어린 왕자'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옥상정원이 정말 작은 행성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소소하지만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고, 밤에는 달과 별이 뜨는 작디작은 행성. 봄에는 장미꽃도 핀다. 방문자라고는 새와 벌, 햇살과 바람, 비와 눈뿐인 작은 공간이다. 나만의 은신처 옥상정원. 모든 경계심을 풀고 쉴 수 있는 곳. 훌쩍훌쩍 징징 짤 때도 있다. 최고의 테라피스트다.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에 실린 사진이다. 어린 시절 옥상에서 물놀이하던 아들이 꽃놀이하는 어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양은심]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에 실린 사진이다. 어린 시절 옥상에서 물놀이하던 아들이 꽃놀이하는 어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양은심]

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는 애들과 함께 하는 친정 나들이가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떠날 수는 없다. 고향 나들이 대신에 내가 찾은 '쉼터'가 꽃을 키우며 흙 놀이를 할 수 있는 코딱지만 한 옥상이다.

아이들이 물놀이할 나이가 지났을 즈음 본격적으로 옥상에 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집에 틀어박혀서 하는 직업이기도 해서 밖에 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일하는 사이사이에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때까지 나는 남편으로부터 '취미 없는 여자'라고 불렸다. 취미를 가질 여유가 없었음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굳이 갖다 붙인다면 애 키우는 것이 취미였지 싶다.

옥상을 가꾸기 시작한 지 8년 정도가 지난 지금, 옥상정원은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이사 가게 되면 옥상을 떼어내어 들고 가고 싶다는 나를 가족들은 어이없어한다. 들고 갈 수 없으니 이사 갈 생각은 없다. 작은 집, 작은 옥상에 만족한다. 내 손 안에 있는 것, 내 품 안에 있는 것, 내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행복해졌다. 그리고 "아 행복해"가 입버릇이 되었다. 나는 좀 모자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지인이 쓴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라는 책의 한 꼭지에 ‘아침에 창문을 열면’이란 그림책과 연결해 나의 옥상정원 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초여름, 원고를 쓰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 달래서 보냈다.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코딱지만 한 옥상정원인데?'라고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서 더 공감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옥상 정원 생활을 글로 써본 것. 책에 소개되고 있다. 도쿄에서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옥상정원 생활이다. [사진 양은심]

옥상 정원 생활을 글로 써본 것. 책에 소개되고 있다. 도쿄에서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옥상정원 생활이다. [사진 양은심]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명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이웃사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야 흉내라도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코딱지 정원 이야기가 소소한 삶의 힌트가 되기를 빌어 본다.

50대를 전후해서 인생과 행복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했다. 40대 중반까지는 애 키우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다. 애들이 내 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즈음, 한숨 돌리고 보니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십여 년이란 세월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 허무했다. '내 인생은?'이란 질문이 훅하고 들어왔다. 내 인생 이렇게 끝나버리는 건가?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너는 어떤 때 행복해?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성공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걸까.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에 소개되지 않는 삶은 실패한 건가.
대체 '성공'의 기준은 뭐지?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 김건숙 지음. [사진 양은심]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 김건숙 지음. [사진 양은심]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안다. 나에게 주어진 일상에 행복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채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소중히 바라보면 느껴진다는 것을. 타인이 아닌 내 삶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곳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큰 행복 하나도 좋으나 올망졸망한 행복들 또한 좋지 않은가. 작은 행복들은 잘 보듬지 않으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 버린다. 놓치지 말자.

코딱지만 한 정원을 가꾸며 꿈꾼다. 언젠가 제주도에 가서 꽃밭과 텃밭을 가꾸며 일본에서의 경험을 사회에 환원할 날이 오기를. 실현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인생의 흐름에 맡겨 볼 생각이다. 제주도에서 못하면 도쿄의 하늘 아래서 길을 찾으면 그만이다.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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