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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귀하신 몸’이로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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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고위·권력층 사칭 사기가 판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암행어사를 사칭하는 일이 잦았다. 숙종 38년(1712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이천재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천재는 가짜 어사 행세를 하며 고을 수령들로부터 온갖 대접을 다 받았고, 임명장을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다. 그러다 꼬리가 밟혀 극형에 처해졌다. 순조 22년(1822년) 암행어사 박래겸이 126일간 평안도를 돌고 남긴 『서수일기(西繡日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간사한 무리가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거나 “암행어사와 친밀한 사이”라며 아전과 백성들을 공갈 협박해 돈과 재물을 빼앗았다.’ 때론 박래겸 자신조차 가짜로 의심받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때인 1957년엔 이른바 ‘귀하신 몸’ 사건이 일어났다. 경북 경주경찰서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아버지 명으로 지역 상황을 살피러 왔다”고 했다. 경주경찰서장은 “대통령 각하의 아드님께서 와주셔서 한평생의 영광입니다”라며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귀하신 몸’은 떠돌이 청년으로 이강석과 얼굴이 닮았을 뿐이었다. 이 사건 뒤 ‘귀하신 몸’은 유행어가 됐다.

93년 말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사칭한 수백억원대 땅 사기단이 검찰에 붙잡혔다. 당시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직후로, 세간에 부동산실명제 설이 나돌던 때였다. 사기단은 “고위층이 숨겨둔 땅을 팔려 한다”며 재력가들에게 접근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셀프 취업 청탁’이 있었다. 청와대 총무비서관이라며 대기업에 전화해 “○○○의 취업을 부탁한다”고 하고는 해당 기업을 찾아가 1년간 간부로 근무한 사건이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름을 들먹거린 사기도 비일비재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권력 사칭 사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잘 안다. 모친을 사면해 주겠다”며 3000만원을 가로챈 일, 한병도 정무수석의 보좌관이라며 4억원을 받아낸 일 등이 최근 있었다.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은 가짜 권양숙 여사에게 4억5000만원을 뜯겨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권력 사칭 사기는 통상 두 가지 상황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하나는 경제가 가라앉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이들이 많을 때다. 다른 하나는 특정 기관의 권력이 막강해진 경우다. 이럴 때 소시민들은 사칭인지 아닌지 확인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과연 요즘 고위층 사칭 사기가 부쩍 입에 오르내리는 건 왜일까. 혹시 ‘경제난’과 ‘권력 비대’라는 두 가지가 겹친 건 아닐까.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