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첫 여성 원내대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자유한국당 사상 첫 여성 원내대표다.”

나경원 의원의 원내대표 선출 기사마다 들어 있는 이 문구를 보며 10여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대 중반 어느 날 새벽, 여당과의 대치를 마친 한나라당(한국당의 전신) 원내대표단이 뒤풀이를 한다는 소식에 무작정 찾아갔더랬다. 남녀 불문, ‘음주량=취재 의지’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알코올의 위세에 음성이 음향으로 들리는 순간이 왔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누군가 뭔가를 건넸다. “술 깨는 약이다. 내일 아침엔 좀 괜찮을 게다.” 부대표였던 나경원 의원이었다. 그 자리엔 그도 있었다.

민주당 계열 정당과 달리 한국당 계열은 남자들의 나라였다. 2000년 전후 여성 정치인이라고 해야 여성운동 명망가거나 대통령의 딸(박근혜 전 대통령)뿐이었다. 그러다 2002년 젊은 전문직 여성들이 영입됐다. 서울행정법원 판사 출신 나경원 변호사와 이혜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조윤선 변호사였다.

이들은 남자들의 나라에 생존하기 위해 각자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줄곧 주목을 받았다. 또 주목받기를 원했다. 비판도 따랐다. 때론 마땅했지만 때론 부당도 했다. 나 의원의 경우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던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패배한 이후 혹독한 얘기를 듣곤 했다. 이듬해 총선에선 이혜훈 의원 등과 더불어 공천을 받지 못했는데 보선 패배의 책임 때문이라고 했다. 당내에선 그러나 “공천권을 쥔 친박계 영남 실세들이 이들을 꺼렸다”는 말도 나왔다.

한국당의 그런 ‘흑역사’를 알기에 나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 의해 원내대표로 뽑혔다는 소식이 반갑다. 하나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느낌이다. 나 원내대표로선 거대한 시험대를 마주한 셈이다. 남들 앞에 서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보수 정당에 디딤돌이 되지 못한다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내가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친구들은 내 기억으로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고난 한 번 겪지 않고 편안하게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내가 선천적으로 말을 잘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내가 전혀 어수룩하지 않고 빈틈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모두 틀렸다.”(『세심』) 한때 그의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수긍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말을 증명할 책임, 이제 그에게 있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