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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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춘사에서 대현 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 절의 주지였는데 눈빛이 날카롭고 얼굴이 흰 중년의 수도승이었다. 그 외에 젊은 객승 두엇이 더 있었지만 뚜렷이 기억에 남은 게 없다. 대현 스님은 웅이의 소개로 절에 머물게 된 나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이 나면 보살 할머니를 도와 불쏘시개로 쓸 마른 나무의 잔가지 치기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에 올랐다. 그래서는 한짐 그득히 짊어지고 내려오곤 했다. 마침 채소를 돌볼 철이라 절 텃밭에 나가앉아 김매고 거름 주고 저녁 무렵에는 스님 방에 불려가 얘기를 나누었다. 어찌된 일인지 평생을 돌아보면 윗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편이었다. 내가 무슨 권모가 있다거나 잘보이려고 애쓴 적은 없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밝은 데다 오히려 버릇없고 거침없는 편이었다. 이러한 꾸밈없는 성격이 오히려 어른들에게는 부담이 없었던 모양인가. 나는 말을 직접 꺼내지는 않았지만 웅이가 출가할 뜻이 있는 내 속내를 대현 스님에게 전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스님 방에 들어갔더니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한다. 다리를 주물러드리는데 스님이 말을 꺼냈다.

- 나는 일제 때 먹고 살 길이 없어 어린 나이에 중이 되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전쟁 때에 서로 잘 알던 이들이 죽이고 죽던 꼴을 보는 일이었다. 나도 머잖아 이 절을 떠나 선방으로 찾아들 모양인데 자네 내게 하고싶은 말이 없는가?

나는 서두르지 않고 대답했다.

- 오래전부터 마음 닦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 대답이 신통치는 않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내 도와줄 수도 있다.

- 도와주십시오.

그는 동래 범어사로 찾아가라면서 조실이던 하동산 큰스님 앞으로 서찰 한 통을 써주었다. 그는 범어사의 원주 고광덕 스님이 자신의 도반이니 그이를 먼저 뵈라고 일렀다. 나는 웅이의 배웅을 받으면서 함안 장춘사를 떠나 부산 동래로 향했다.

그 무렵에는 부산시 외곽의 동래 언저리는 온천 부근만 번화했을 뿐 주위는 온통 들판과 솔밭이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리는데 승복 차림의 소년이 먼저 내렸다.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려하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 범어사에 가세요?

- 예, 스님은 거기 계시나요?

- 네… 그런데 무슨 일로 가세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대답했다.

- 출가하려구요.

소년 승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 많이들 오십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왜 그렇죠?

소년승은 당연하게 말했다.

- 인연이 없어서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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