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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 묻지 않고 봉투만 오가 … 모금함 6개에 1000명 줄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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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이 3일 오후 충남 천안 단국대 체육관에서 ‘박수현의 따뜻한 동행’ 출판기념회와 북 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지자체장과 지지자 4000여 명이 참석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이 3일 오후 충남 천안 단국대 체육관에서 ‘박수현의 따뜻한 동행’ 출판기념회와 북 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지자체장과 지지자 4000여 명이 참석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3일 오후 3시 단국대 천안캠퍼스 체육관. 더불어민주당 충남지사 예비후보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의 출판기념회는 시작 한 시간여 전부터 성황이었다. 식전 행사에서 힙합그룹과 치어리딩, 판소리 영재 소녀의 노래 공연 등으로 시끌벅적했다.

지방선거 앞두고 연일 출판기념회 #예식장 온 듯 봉투에 이름 적어 내 #카드단말기·명함수거통 있는 곳도 #“눈도장 찍자” 사진 찍으려 대기 #“거스름돈 주나” 묻자 당황하기도

체육관 입구 옆 테이블에는 하얀 서류봉투에 담긴 책이 쌓여 있었다. 입구 양쪽으로 3개씩 6개의 모금함이 놓였다. 그 사이사이에 선 행사 관계자들이 책을 판매했다. 책값은 참석자들이 봉투에 담아 모금함에 넣었다. 한 권에 2만원인 책값이 제대로 담겼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한 손님이 “몇 권까지 줄 수 있나요”라고 묻자 행사 관계자는 웃으면서 “달라는 대로 드린다”고 답했다. 현장에 비치된 흰 봉투에 5만원권이나 1만원권 여러 장을 서둘러 담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1000명이 훌쩍 넘는 손님들이 책 한두 권씩을 손에 들고 다녔다.

◆"선거 비용 필요해서”=출판기념회 풍경은 결혼식장과 비슷했다. 넓은 주차 공간이 꽉 채워졌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엔 ‘모금함’이 있다. 이달 들어서는 6·13 지방선거에서 광역·기초 자치단체장과 교육감 선거, 국회의원 재·보선 등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연일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다. 출판기념회 개최 금지 시점(3월 14일)이 임박하면서 3월 첫째·둘째 주말은 출판기념회가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이날 책을 산 참석자들은 박 전 대변인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눈도장’을 받거나 참석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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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안희정 충남지사와 민주당의 충남지사 예비후보들도 참석했다. 박 전 대변인과 당내 경쟁을 하는 양승조 의원은 10일 같은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안 지사는 “박 전 대변인은 친구이며 동지”라고 신뢰를 표했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책 자체보다는 세 과시와 ‘실탄’(선거자금)을 모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편법적 자금 모금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박 전 대변인도 이날 방송인 남희석씨가 진행하는 2부 토크쇼에서 행사 취지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선거 비용도 필요하고 해서”라고 말했다.

1일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열린 광주시장 출마예정자 강기정 전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 [프리랜서 장정필]

1일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열린 광주시장 출마예정자 강기정 전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 [프리랜서 장정필]

◆방명록에도 이름·전화번호=4일 오전 10시30분 광주광역시 서구의 한 건물은 30분 뒤 열릴 강기정 전 민주당 의원의 출판기념회 준비로 부산했다. 흰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남자 대학생들이 주차 관리를 했고, 입구에서는 같은 티셔츠를 입은 비슷한 연령대의 여학생들이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책을 서류봉투에 담았다. 강 전 의원은 광주시장에 도전할 예정이다.

한 참석자가 수십만원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두툼한 봉투를 건네고는 “거스름돈은 주나요”라고 묻자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결국 그는 거스름돈은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대다수의 책 구매자는 책값이 담긴 봉투 겉면에 이름을 적거나 방명록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지인들을 대표해 참석한 듯한 한 노인은 손바닥만 한 수첩에 적힌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일일이 옮겨 적었다. 모금함 옆에 명함 수거통도 있었다. 한 관계자는 “오후 2시, 4시에 행사가 다시 열리며 책은 오후 6시까지 판매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공무원은 “최근 선거 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가 잇따라 열려 일부 간부는 눈도장을 찍어 놓으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산다”고 말했다.

3일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에서 열린 이완섭 서산시장 출판기념회. [최종권 기자]

3일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에서 열린 이완섭 서산시장 출판기념회. [최종권 기자]

◆은유적으로 지지 요청=지난 3일 충남 서산시 문화회관에서는 자유한국당 이완섭 시장의 책 『해 뜨고 꽃피는 서산』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000여 명이 모인 문화회관 로비에는 모금함 4개가 놓였다. 현금을 준비 못한 참석자들을 위해 카드단말기도 설치됐다. 줄을 서서 책을 산 사람들은 한복을 차려입은 이 시장 부부와 악수를 한 뒤 2, 3층 객석에 앉았다.

책의 정가는 1만5000원이었다. 한 구매자가 “40만원이면 몇 권이죠”라고 묻는 모습도 보였다. 봉투 4개를 모금함에 넣은 그에게 책 10여 권이 전달됐다. 행사 관계자는 “봉투가 두껍다 싶으면 책을 몇 권 더 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이 시장의 지방선거 3선을 위한 출정식의 의미가 있었다. 홍문표 한국당 사무총장과 같은 당 이인제 고문, 성일종(한국당 충남도당위원장) 의원 등 600여 명이 강당을 꽉 채웠다. 현행법상 출판기념회에서 선거운동은 벌일 수 없다. 하지만 성 의원은 책 제목을 인용해 “해 뜨고 꽃피는 서산 다음에는 뭐가 있겠냐. 열매가 잘 열릴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지방선거에서 이 시장을 도와달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같은 날 서울 노원구 상계교회에서는 이 지역 구청장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힌 바른미래당 김광수 시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광수의 낙서집』이라는 책을 받고 모금함에 돈을 담았다. 교회 예배당에는 500명가량이 모였다.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은 “김 의원이 큰 정치인 될 수 있도록 해주실 거죠”라며 암시적으로 선거 때의 지지를 부탁했다. 전날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안철수 전 대표도 참석해 “일 잘하는 김 의원이 좀 더 시간과 여건이 주어져 더 많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선관위도 못 말리는 ‘묻지마 모금’=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 출판기념회를 규제해 정가 판매 이외의 모금을 제한하려 했으나 입법에는 실패했다. 정치자금법의 규제망을 벗어난 법의 사각지대에서 ‘묻지마 식’ 모금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선관위는 충남 아산 소재 지역농협 직원을 고발했다. 지난해 12월 열린 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선거구민 30여 명에게 교통편의(버스 1대, 30만원 상당)와 저서(20권, 30만원 상당)를 무료 제공한 혐의가 적용됐다. 일부 지역에선 “표를 달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지지를 호소했다가 선관위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어서 출판기념회 현장을 각 지역 선관위가 모니터링하고 있다. 출판기념회의 금품 모금 등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가 가능한 마지막 토요일인 10일에는 경기지사 후보로 나서는 민주당 전해철 의원, 대구시장에 출마하는 한국당 권영진 시장이 출판기념회를 연다. 주중에는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민주당 민병두 의원(8일), 박영선 의원(9일) 등의 행사가 잡혀 있다.

천안·서울=김승현·김준영 기자,
광주·서산=김호·최종권 기자 s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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