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블랙리스트 PC 재개봉" vs "재재(再再) 조사는 무리" 김명수의 선택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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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출근길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연합뉴스]

23일 출근길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연합뉴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빠뜨리지 않고 진행해 나가겠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5일 오전 출근길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판사 뒷조사 의혹) 사태를 조급하지 않게 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날 김 대법원장은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 PC 분석 결과를 내놓은 지 이틀 만에 입장문을 발표했다. ‘추가조사위 결과 후속 조치’와 ‘내부 개혁’ 투트랙으로 법원 내 혼란을 봉합하고 돌파구를 찾겠다는 복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로 촉발된 법원 내ㆍ외부의 험난한 파고(波高)를 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블랙리스트 사태 '후속 조치' 관심 #물적조사 보다 인적조사 초점 가능성 #김소영 법원행정처장 오는 1일 교체 #후임은 안철상 대법관으로 결정

블랙리스트, 법원행정처 PC ‘재재(再再)조사’ 이뤄질까

김 대법원장은 입장문에서 ‘합당한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후속조치의 구체적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 결과를 보완, 조치 방향을 논의 제시할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겠다”고 했다.

법원 안팎의 관심은 추가조사위가 확보했던 법원행정처 PC로 다시 쏠린다.
앞서 추가조사위는 비밀번호가 걸린 760개 문건 파일은 조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PC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다. 일부 판사들 사이에선 “암호 파일이나 임 전 차장의 PC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암호가 걸린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 방안(인사)’ 파일이 인사 불이익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 상황이다.

하지만 법원 내에선 PC ‘재개봉’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앞서 추가조사위는 PC 3대의 하드디스크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분석을 진행했다. 분석이 끝난 뒤 디가우징(degaussingㆍ자기장을 이용해 복구할 수 없도록 삭제하는 기술)으로 복제본을 초기화 시켰다. 재개봉에 나설 경우 법원을 들썩이게 만든 블랙리스트 사태가 재점화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진상조사위(위원장 이인복)→추가조사위→보완 기구’까지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재재(再再)조사’가 이뤄진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김 대법원장 입장에선 부담이다.

때문에 일단 PC 재개봉 등 ‘물적 조사’보다는 ‘인적 조사’에 후속 조치의 초점이 맞춰질 거란 분석이 나온다. 22일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문제의 PC에선 청와대와 당시 법원행정처의 ‘교감’ 정황이 담긴 문건이 발견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을 둘러싸고 청와대가 법원행정처 등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당시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지고 징계 등 처분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 관계자는 “사태 진화에 나선 대법원장이 PC 재개봉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며 “김 대법원장이 24일 입장문에서 후속 ‘조사’라는 표현 대신 ‘조치’ ‘조사 결과 보완’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쓴 것은 이를 염두해 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아직 ‘보완 기구’가 어떤 형태인 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른 법원 관계자는 “외부 중립 인사를 영입하는 방안 등을 놓고 김 대법원장이 고심 중인 것으로 안다”며 “향후 이 기구에서 대법원 윤리감사관실을 대신해 인적 조사를 맡거나 ‘PC 재조사’ 등을 권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 대법장이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사태 봉합에 나설 것을 분명히 한 만큼 관련자 내부 징계 등 조치가 나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현재 검찰이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김 대법원장 고발 사건을 주시하는 상황서 ‘자체 처분’을 통해 외부 개입을 막을 것이란 분석이다.

‘사법부 공룡’ 몰린 법원행정처 개편, 갈등 봉합도 과제

내부 개혁 방침은 법원행정처에 초점이 맞춰 있다. 김 대법원장은 행정처 인적 쇄신과 조직 개편, 상근 판사 축소를 방안으로 내놨다. 법원행정처의 대외 업무를 전면 재검토 하겠다고 밝혔다. 때문에 판사 ‘뒷조사’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는 법원행정처 핵심부서인 기획조정실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김 대법원장은 상고허가제 도입과 대법관 증원 등을 중점 과제로 천명한 이상 법원행정처 ‘축소’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중요한 사건만 선별해 심리하는 상고허가제는 1981년 시행됐다가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에 1990년 페지됐다. 하지만 대법관 1인 처리 사건이 연간 3361건(2016년 기준)에 이르자 김 대법원장도 상고허가제와 대법관 증원 카드를 빼든 상황이다. 이를 위해선 국회와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그동안 대외 업무는 법원행정처가 도맡았다. 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개편 과정에서 상고허가제 등 과제와 상충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 11월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서 발언 중인 김소영 법원행정처장. 임현동 기자

2017년 11월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서 발언 중인 김소영 법원행정처장. 임현동 기자

법원 내 갈등 봉합도 숙제다. 이날 김 대법원장은 다음 달 1일자로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의 후임으로 안철상 대법관(사법연수원 15기·사진)을 임명했다. 김소영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최근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김 처장은 지난해 7월 양 전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장으로 임명됐다. 법조계는 이번 사의 표명이 블랙리스트 사태, 김 대법원장이 ‘인적 쇄신’을 언급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이번 사태에 대한 판사들의 입장도 엇갈린다. 지난 24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엔 10여개의 글이 올라왔다. 김동현 대구지법 안동지원 판사는 “책임자에 대한 징계는 물론 형사처벌이 되는 부분은 대법원이 직접 고발해야 한다”고 적은 반면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조사 결과는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것이었다. 추가조사위를 조사할 역 조사위 구성을 제안한다”는 엇갈린 반응을 내놨다.

23일 대법관들이 추가조사위 조사와 관련된 이례적인 반박 성명을 낸 것도 김 대법원장 입장에선 부담이다. 이날 출근길에서 김 대법원장은 “대법관들도 이번 문제 해결을 위한 나의 고뇌와 노력을 충분히 이해했고, 빠른 시간 내에 슬기롭게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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