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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야당은 왜 동반추락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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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대단한 여성의 대단한 연설이었다. 품위와 열정, 감동이 있었다. 지난 1년 트럼프의 자랑·조롱·분노의 말들에 길들여진 미국 사회가 오랜만에 들썩였다.

윈프리 열풍은 미 민주당 몰락의 방증 #해로움 불쾌함 쌍으로 주는 우리 야당

오프라 윈프리. 지난주 골든글로브 시상식 연설에서 그는 침묵과 굴종을 견뎌내야 했던 여성들의 아픔을 애절하게 호소했다. “소녀들아! 마침내 새로운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난 그가 2016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지금 늦은 시간까지 깨 있는 소녀들아! 다음 유리천장을 깰 차례는 바로 너란다”고 했던 힐러리와 오버랩돼 보였다. 집단 착시현상일까. ‘2020년 윈프리 대망론’의 불길은 무섭게 번지고 있다. 지난 주말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 윈프리’ 가상대결 결과는 39% 대 50% 윈프리 승리.

가난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9살 때 같은 집에 살던 사촌오빠와 외삼촌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14살 때 가출해 마약을 복용하고 미숙아를 낳았다. 그런 불우한 경험들을 자신의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고백했고, 미 국민은 함께 눈물로 위로했다. 지금은 트럼프보다 더 부자(약 3조원)다.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다.

윈프리 열풍을 놓곤 여러 해석이 나온다. “‘나쁜 아마추어’ 트럼프도 하는데 ‘착한 아마추어’ 윈프리라고 못할 것 있냐”는 말부터 “오바마(흑인)+힐러리(여성)=윈프리(흑인 여성)”란 분석까지 나온다. 하지만 역시 근본 원인은 ‘야당’의 추락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를 겪으며 앞으로 대통령은 ‘최소한의 공직 경력’을 지녀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도 윈프리를 찾는 건 바이든 전 부통령, 샌더스 상원의원 등 민주당 리더의 인기가 얼마나 몰락했는지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비단 미국만의 현상일까. 일본은 야당이 7개 정당으로 갈라져 서로 엎어지고 자빠지는 코미디극을 벌이고 있다. 제1야당의 지역구 공천이 절반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다. 정권교체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베의 집권 자민당이 아무리 오만하고 무능해도 야당의 미련함과 게으름이 그걸 넘어선다. 그러니 정치에 참신함도, 위기감도, 확장성도 없다.

우리라고 다를까. 문재인 정부 취임 후 사드 배치나 탈원전을 둘러싼 혼란, 수능 개편 졸속 연기, 위안부 합의 엉거주춤 봉합, 7시간 만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 뒤집기 등 각종 헛발질이 난무했다.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률은 정말 이 정권 최대공약이 ‘일자리 늘리기’였는지 의심케 한다. 그럼에도 72%의 지지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권력기관 개편안을 31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 같은 날에 딱 맞춰 발표하는 ‘이벤트 마인드’? 기자는 서서 묻고 대통령은 앉아 답하고, 게다가 추가 질문→추가 답변도 없는 봉숭아학당 회견을 ‘이게 백악관 식!’이라 포장하는 ‘너 몰라라’식 홍보? 둘 다 정답일 게다.

하지만 부동의 일등공신은 야당이다. 누가 먼저 손을 잡았느니, 라이언 인형이 어땠느니 따위의 꼴불견 인형극을 찍고 있는 자유한국당이나, 욕설과 삿대질의 쌍팔연도 정치를 ‘새 정치’라 우기는 국민의당이나 하나같이 기대난망이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정치는 해로운 것과 불쾌한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 비꼬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야당은 해로움과 불쾌함을 동시에 쌍으로 우리 국민에게 안기고 있다. 가히 역대급 재주다. 그러니 6월 지방선거 예측 또한 역대급 참패다.

생각도 다르고 속내는 더 다른 한·미·일 3국. 하지만 ‘야당 실종’만큼은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졌을까. 희한한 일이다. 그래도 미국에는 윈프리 같은 ‘대타’라도 있으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