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말바꾸기속에 기구해진 규제프리존특별법의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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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회 개원 첫날인 지난 2016년 5월 30일 당시 새누리당 의원 125명이 발의한 규제프리존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모습. [연합뉴스]

20대 국회 개원 첫날인 지난 2016년 5월 30일 당시 새누리당 의원 125명이 발의한 규제프리존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모습. [연합뉴스]

내 이름은 ‘규제프리존특별법’이다. 정식 이름은 ‘지역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프리존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이지만 너무 기니까 대개 약칭으로 불린다. 나는 각종 규제로부터 과감히 벗어난 무풍지대(프리존)를 육성하기 위해 2016년 3월 24일 태어났다. 당시 날 탄생시킨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 참모였던 강석훈 전 새누리당 의원이다. 강 전 의원이 국회에서 나를 대표발의한 취지는 이렇다.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14개 시ㆍ도에 지역별 맞춤형 전략산업을 지정하고 이를 육성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적용되는 구역, 즉 규제 프리존을 둔다’.

내 나이는 만 두살도 안됐지만 인생유전은 누구 못지 않게 파란만장하다. 내가 갓 태어났을 때만 해도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산업계에선 내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규제 지뢰’를 없애고 기업 투자와 일자리를 늘릴 총아가 될 거라는 기대감이 컸다. 박 전 대통령 본인도 규제개혁 전도사를 자처하며 직접 드라이브를 세게 걸기도 했다. 생후 두 달째인 2016년 5월 18일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한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저성장 시대를 극복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려면 규제개혁 프레임을 선제적이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규제를 “우리가 쳐부술 원수이자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 암덩어리‘에 비유한 적도 있다. 나는 대통령이 이 정도 말 했으면 내가 머잖아 국회를 통과해 신분이 미생(未生)에서 완생(完生)으로 바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기본적으로 나를 ‘태어나선 안 될 법’으로 취급했다. 민주당은 “금지된 것 이외에 나머진 모두 허용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풀면 국민 생명ㆍ건강ㆍ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나를 통과시키는 것에 극력 반대했다. 새누리당은 내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민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여야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나는 소관 국회 상임위에서도 찬밥 신세였고 결국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꺼진 듯 했던 내 운명의 불씨는 다시 살아났다. 20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16년 5월 30일 당시 새누리당 의원 125명 전원이 참여하고 이학재 의원이 대표발의하면서 나는 소생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누리당이 무너지고 국회 1당을 민주당이 차지하더니 곧 정권마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나는 이대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민주당도 정권을 잡더니 서서히 나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8일 혁신성장 전략회의에서 “낡은 규제와 관행이 민간 상상력의 발목을 잡는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 때 세계화를 하면서 규제완화를 논의한 뒤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되고 뒤처진 이유가 뭐냐”고 경제팀을 다그쳤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 때 나를 ‘대기업 특혜법’으로 몰아세웠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제 나를 대체할 규제완화 법안을 이번 달에 내놓겠다고 나왔다. 조만간 나의 배다른 동생들이 태어날 참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여당 간사인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신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개혁 패키지 법안들을 이달 중 마련할 계획”이라며 “과거 새누리당에서 입안한 규제프리존특별법보다 더 능동적이고 규모가 더 크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나와 배 다른 동생들을 1월 내로 일괄 발의한 뒤 2월 임시국회 때 처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문 대통령 의지가 실린 이들 법안에 총력을 기울일 태세다.

그런데 정작 나를 낳아준 자유한국당에선 이제 나는 관심권 밖인 듯하다. 한국당 핵심 관계자는 “야당이 된 이후에도 규제프리존특별법을 계속 중점 법안으로 내세우는 건 좀 무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배 다른 동생들(민주당의 규제개혁 패키지 법안)을 껴안을 것 같지도 않다. 한국당 관계자는 “여당의 대안 입법은 기존 법안과 큰 차이가 없는데 포장지만 바꿔 내놓은 꼼수”라며 “기존에 마련된 규제완화 법안부터 통과시키고 차차 보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배 다른 동생들도 나처럼 여야 싸움에 끼어 기구한 팔자가 될 것 같다. 여야가 바뀌면 똑같은 사안에 대해 말이 왜 180도 달라지는걸까. 국회의원들에게 정략을 떠나 나라를 생각해달라고 하면 아직도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김형구ㆍ김경희ㆍ송승환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 이 기사는 규제프리존특별법을 1인칭 시점으로 구성해 기사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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