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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21세기 부자유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지난 일요일 아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 다녀왔습니다. 저명한 한국계 미국인 로봇학자가 그간 연구하고 만든 로봇을 한국 전자산업의 시발점 같은 세운상가에서 전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아빠가 각각 아이를 데리고 출동했습니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각종 부품들로 빽빽하던 세운상가 점포들은 그때의 위용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건물의 모습은 한국 근대화의 지층의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입김 서리는 날씨에 야외 회랑에서 열린 전시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인 연구원들과 그 학자가 만들어낸 최첨단 로봇들을 선보였습니다. 사람 같기도 하고 때로는 곤충과도 흡사한 로봇들은 인간의 삶을 위해 지금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빅 데이터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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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아들은 “오래된 낡은 공간에서 이런 로봇 전시회를 여니 로봇들도 오히려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 그것보다 낯설지 않은 광경은 많은 아빠가 아이 손을 잡고 이른 시간임에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대는 물론 전시를 보기엔 좀 이르지 않을까 싶은 서너 살 아이들까지 흔쾌히 데리고 온 ‘아빠들’은 전시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설명을 듣고, 창의력을 키우는 방법이나 공부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했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는 꼬마를 데려온 아빠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신중히 정보를 습득하고 정제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출산·육아 박람회 입장객도 아빠가 절반에 육박하고 남색 아기띠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최근 아기 화장품 모델에 엄마뿐 아니라 아빠 역할로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선정되는 것 역시 두드러진 변화이지요.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하던 시기의 산업 역군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늘 밖에만 있던 아빠의 모습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워할 ‘마왕’ 신해철의 노래 속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사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는 가사는 지난 세기 아버지의 모습을 통렬히 묘사했습니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 거듭난 요즘의 아빠는 이제 21세기형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일상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