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짓는다고 집수리도 막더니 대책 없이 백지화, 이래도 됩니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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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일대. 2029년까지 천지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최근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으로 건설이 백지화됐다. [백경서 기자]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일대. 2029년까지 천지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최근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으로 건설이 백지화됐다. [백경서 기자]

지난달 29일 오전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회관. 할머니들과 마을 이장이 모여 근심스러운 얼굴로 천지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 발표로 천지원전 건설 백지화가 사실상 결정된 데 대해 정부가 주민 피해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영덕군 천지원전 예정지 가 보니 #재산권 제한됐던 주민들 반발 거세 #“정부, 고시 해제하고 보상책 내놔야” #지주들, 한수원 부지매입 요구 소송 #군, 지원금 380억원 사용 허가 촉구

영덕읍 석리는 인근 노물리, 축산면 경정리 등과 함께 정부가 천지원전을 건설하기로 한 부지다. 2008년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하면서 추진됐고, 2015년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건설사업이 확정됐다. 2029년까지 신규 원전 2기를 짓기로 했다. 324만여㎡ 면적이다. 김옥순(84) 할머니는 “정부에선 원전 짓는다고 우리 설득한 뒤에 집도 못 고치게 했는데 이제 와 그만둔다고 모른척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지원전 인근은 2012년 전원개발사업 예정구역으로 고시가 지정됐다. 이에 따라 토지 소유주들의 재산권이 제한됐다. 주민들은 건축물 건설뿐만 아니라 토지의 용도 변경이나 집수리까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초반에는 미역 생산업에 피해가 갈 것이라며 원전에 반대하던 주민들도 마을 발전이 제한되자 차라리 원전이 빨리 들어섰으면 했다고 한다. 이척이(87) 할머니는 “정부에서 금방 이사가야할 것처럼 얘기하니, 농업·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다른 생계거리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백지화됐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천지원전 건설부지

천지원전 건설부지

천지원전건설준비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3~4군데 가구만 보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찬 석리 마을 이장은 “원전 건설사업 추진에 앞장선 주민 일부만 토지매입에 동의해 보상을 받았고, 외부 투자자들은 건설 제한 고시 나오기 전에 펜션 한 채 후딱 짓고 한국수력원자력에 팔고 나갔다. 남은 건 진짜 주민들 뿐”이라고 말했다. 한수원은 지난해 7월 매입공고에 들어가 전체 부지 중 18.2%(59만여㎡)를 매입한 상태다. 실제 천지원전 건설예정부지 곳곳엔 컨테이너로 급하게 지은 듯한 건물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건축이 완료됐지만 대부분 운영은 하지 않았다. 김 이장은 “원전을 짓지 않을 거라면 빨리 확정을 한 다음에 마을 발전을 불가능하게 했던 고시를 해제하고 그동안 주민들이 행사하지 못한 재산권에 대한 보상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천지원전 편입 확정부지 지주들은 소송에 나섰다. 지주 38명은 “한수원이 원전을 짓기로 한 땅을 모두 매입해야 한다”며 지난 7월 대구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참가한 토지 소유주 조혜선(64)씨는 “다른 대체에너지 단지를 짓든지,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천지원전 건설 백지화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영덕군도 마찬가지다. 일부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영덕군은 천지원전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2014년 원전자율유치 특별지원금 380억원을 받았다. 지역발전 사업, 공공복지 사업 등에 쓰기로 한 지원금이다. 지난 8월 영덕군은 정부에 지원금의 사용계획을 전달했으나, 정부에서는 법적 검토를 해봐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는 게 영덕군의 말이다.

지난달 26일 이희진 영덕군수는 기자회견을 열어 지원금 380억원을 사용토록 즉각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 천지원전 고시지역 부지에 대한 적극적인 매입과 이 부지가 신재생에너지·문화관광 등 국책사업의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 제시 마련도 촉구했다. 이른 시일 내 천지원전 고시지역 해제절차를 진행해 줄 것도 요구했다. 이 군수는 “지난 7년간 천지원전 추진과정에서 영덕군이 겪은 극심한 사회·경제적 피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말했다.

영덕=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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