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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기근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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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연휴 중 본 영화 ‘남한산성’은 신기한 영화였다. 내용이 아니라 배역 얘기다. 이병헌·김윤석 등 주요 배역이 모두 남성이다. 아역 ‘나루’를 빼면 여성 연기자는 엑스트라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극이라, 혹은 전쟁영화여서일까. 아니면 원작이 원래 그래서일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성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은 찾아보면 많을 텐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본 ‘택시운전사’도, 지난해 봤던 ‘부산행’과 ‘터널’도 남자 주인공의 영화였다. ‘명량’ ‘국제시장’ ‘베테랑’ 등 역대 흥행순위 상위권 작품에도 여성이 주연이나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다. ‘도둑들’의 전지현, ‘덕혜옹주’의 손예진, ‘관상’의 김혜수 정도가 머리에 떠오를 뿐이다. 스크린에서 여배우가 드물어지는 게 한두 해 된 현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영화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2000년대 초반부터 이런 현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배우 한석규는 올 초 개봉한 ‘프리즌’을 촬영하며 “여배우가 한 명도 안 나온 영화를 찍은 건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영화판만이 아니다. 삼촌팬들이 환호하는 걸그룹 공연에는 수천 명이 몰리지만 잘나가는 보이그룹이 한 번 뜨면 수만 명은 기본이다. 요즘 대세라는 보이그룹 ‘워너원’이 지난 8월 데뷔 공연을 했을 때 2만여 석 전석이 매진돼 암표까지 나돌았다. 지난해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빅뱅’ 공연에는 해외에서 온 팬들을 포함해 6만 명이 몰렸다. 장안의 화제였던 ‘프로듀스 101’도 여성 아이돌을 뽑았던 시즌1보다 남성 아이돌을 뽑은 시즌2의 인기가 훨씬 높았다. 국민 팬투표에서 1위를 한 강다니엘을 두고 “대한민국은 문재인 대통령과 강다니엘 두 사람이 움직인다”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남녀평등의 역설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상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고 향유하는 건 여성이다. 이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잘생기고 멋진 남자 캐릭터들이 갈수록 인기를 얻는다. 반면 남성들이 주로 찾는 여성 연예인 수요는 상대적으로 위축된다. 19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같은 시절은 남자 지갑에서만 돈이 나오던 때의 얘기일 뿐이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영화 한 편을 보며 뒤늦게 깨닫는다. 우울한 명절을 보냈을 여배우들의 건투도 빈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