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ㆍ법원 '영장 갈등' 악화…'저의' 공방에서 법리 다툼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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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지검 이미지. 임현동 기자

서울 중앙지검 이미지. 임현동 기자

구속영장 발부를 둘러싼 검찰과 법원의 갈등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지난 8일 양측이 입장문 발표를 통해 ‘저의(底意)’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면 이번엔 법리 판단을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법률가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듯한 발언도 주고 받았다.

KAI 전 간부 영장기각에 검찰 "납득 어렵다" #'증거인멸 교사' 놓고 법원ㆍ검찰 입장 갈려 #지난 8일 신경전 이후 6일 만에 갈등 재점화

검찰은 14일 자정 법원의 판단을 반박하는 입장을 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 판사는 13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분식회계 의혹과 관련된 증거인멸을 지시한 혐의(증거인멸 교사)를 받는 전 고정익개발사업관리실장 박모씨에 대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강 판사는 “증거인멸 지시를 받은 사람(직원)이 자신의 형사사건(분식회계)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했다는 점이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기각 판단이 내려진 지 1시간 20분 만에 “영장 기각 사유를 수긍하기 어렵다”고 반발했다.

검찰ㆍ법원의 충돌 지점은 박씨의 ‘증거인멸 교사’ 혐의가 성립하느냐다. 증거인멸 교사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타인에게 증거를 없앨 것을 지시·사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증거인멸과 관련한 법리는 다소 복잡하다. 우리 형법(제155조)의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경우’ 처벌토록 규정했다. 자신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한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하지만 교사(敎唆ㆍ타인을 부추겨 나쁜 짓을 하게 하는 행위)죄는 조금 다르다. 다른 사람을 시켜 타인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했을 경우는 물론, 자신의 증거를 인멸하게 한 경우도 ‘증거인멸 교사죄’가 성립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다만 지시를 받은 사람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증거인멸을 시킨 것은 ‘교사죄’에 해당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남 사천 본사 [연합뉴스]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남 사천 본사 [연합뉴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은 인멸한 증거가 ‘지시받은 사람’에게도 형사사건의 증거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멸을 지시한 박모씨뿐 아니라, 실행에 옮긴 사람 자신의 형사사건 증거가 될 수 있어 교사죄의 범죄요건을 구성하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해당 증거는 KAI의 분식회계와 관련한 보고서였다. 검찰은 ‘실장 박씨→직원→증거서류 세절’로 이어지는 범행 과정에서 증거인멸을 실행한 직원은 형사사건 관련자가 아니라고 봤다.
검찰 관계자는 “증거서류를 세절한 직원은 개발부서 직원들로 분식회계 혐의와 관련 없다“며 ”서류를 파쇄한 직원들은 회계와 무관한 문외한들로 박씨가 골라낸 서류들을 지시에 따라 세절했다”고 반박했다. 다른 관계자도 “법원 논리대로라면 기업 범죄 사건에 연루된 기업 대표가 실무자에게 회사 서류를 파기하라고 시켜도 증거인멸 교사죄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개발부서 직원들은 박씨의 지시에 따라 분식회계 혐의와 관련된 증거 서류들을 세절ㆍ파쇄했다. 서류 세절에 가담한 개발부서 직원들이 분식회계 혐의의 ‘당사자’인지, 무관한 ‘타인’인지를 놓고는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엇갈린 셈이다.

법원은 개발부서 직원도 분식회계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타인(박씨)이 아닌 자신(직원)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할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 관계자는 “재판 전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건 신중히 판단해야 할 사안으로 범죄 혐의가 명확하게 소명되고 도망 등의 염려가 없을 경우 이뤄져야 한다”며 “범죄 혐의부터 확실히 소명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영장을 발부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법리 적용을 놓고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일치하지 않는 자체가 범죄 소명이 충분히 되지 않은 것이며, 형사소송법상 구속 요건에서 벗어났단 의미다.

법조계의 판단은 엇갈린다. 증거인멸 교사죄 자체가 사안별로 달리 볼 여지가 많은데다 사건기록을 읽지 않고선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서울고법 판사는 “유ㆍ무죄 판결을 내린 게 아니라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법원은 일방적으로 검찰 수사를 돕는 곳이 아니고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을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개발부서 직원들이 분식회계에 가담했을 수 있다는 심증을 법원이 어떻게 형성했는지 의문”이라며 “(구속영장 청구는) 큰 사건의 단면인데 마치 분식회계에 누가 어느 범위에서 관여했는지 심증을 가졌다는 게 의아하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연합뉴스]

양승태 대법원장 [연합뉴스]

법조계 안팎에선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며 밝힌 사유가 검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시각도 있다. 한 현직 검사는 “기각 사유를 보면 일반 국민 입장에선 검찰이 ‘증거인멸’과 ‘증거인멸 지시’의 법리 조차 구분하지 못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 관계자는 “기각 사유를 원칙에 따라 설명한 것일 뿐 검찰의 겨냥한 의도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법원ㆍ검찰 간 감정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이후 국정농단, 방산비리, 국정원 여론조작 등 주요사건과 관련해 이뤄진 구속영장 청구 15건 중 11건이 기각됐다. 지난 8일 잇따라 3건의 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검찰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서울중앙지검은 입장문을 발표해 “최근 일련의 구속영장 기각은 이전 영장전담 판사들의 판단 기준과 차이가 많은 것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 형사공보관실도 입장문을 내 “도를 넘어서는 비난과 억측 섞인 입장을 공식 표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향후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려는 저의가 포함된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13일 기자간담회에서 “(8일 영장 기각 유감 표명에) 숨은 뜻이 없다. 말로 하면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고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에 글로 입장을 낸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원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 건전한 비판을 넘어선 과도한 비난이 빈발하고 있다. 오직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돼야 할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현상”이라며 우회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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