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용산기지

중앙일보

입력

주한 미군이 11일 경기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에 신청사를 준공하면서 주한미군의 용산시대를 마감했다.

몽골, 청, 일본군 거쳐 미군이 사용 #비행기 없던 시절 군수품 수성과 도성 진입 최적지 #군사, 교통 요충 평택으로 이전하며 60여년 용산내 캘리포니아 끝

주한 미군사령부는 지난 4월 25일 6ㆍ25 전쟁 당시 8군사령관인 월튼 워커 장군의 동상을 이전하면서 시작한 사령부 이전을 이날 마쳤다. 물론, 국방부나 합동참모본부 등 한국군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위해 주한미군사령관(연합사령관) 집무실 등 일부 시설을 남겨두기로 했지만 60여 년에 걸친 주한미군의 용산기지 주둔은 이날 공식적으로 끝났다.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 이취임식이 지난해 6월 30일 서울 용산기지에서 열렸다. 빈센트 브룩스 신임 사령관(오른쪽)과 이임하는 커티스 스캐퍼로티 사령관(가운데)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용산기지 이전으로 사령관 이취이식도 이젠 평택에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 이취임식이 지난해 6월 30일 서울 용산기지에서 열렸다. 빈센트 브룩스 신임 사령관(오른쪽)과 이임하는 커티스 스캐퍼로티 사령관(가운데)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용산기지 이전으로 사령관 이취이식도 이젠 평택에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선임연구위원은 “용산 미군기지가 처음 세워질 때는 도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보호하기 위한 최적지였다”며 “하지만 기동성이 요구되는 현대전에서는 군수물자 조달이나 작전의 편의성, 북한 장사정포나 방사포(다연장로켓)의 위협 등을 고려할 때 새로운 군사적 요충지로 이동하는 게 적절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무기발달과 전쟁방식의 변화로 인해 용산의 군사적 가치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한강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용산은 말 그대로 영욕(榮辱)의 세월이었다. 짧게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길게는 1300년대 몽골군 등 용산의 역사는 외국군의 주둔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배로 물자를 실어 나르던 시절 용산은 서울의 관문이었다. 또 서울 도성으로 진입하기 최적의 장소로 여겨졌다. 그렇다보니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용산기지 인근의 효창공원 부근에 보급기지를 설치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킨 뒤 일본군이 주둔지를 건설한 곳도 용산이다.

이곳에 미군기지가 만들어진 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다. 990만㎡의 병영시설을 갖추고 있던 일본군이 주둔하던 자리에 미 7사단 병력 1만 5000명이 주둔한 것이다. 이어 6ㆍ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권을 미군에 위임하고, 53년 7월 휴전 후 한국은 이 지역을 미군에 공여했다. 미군은 주한미군사령부(57년)와 한미연합사령부(78년)를 창설하면서 미군 기지를 사실상 관할해 왔다. 세계 유일의 도심속 군사기지였다. 군 관계자는 “용산 미군기지 안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해외승인이 나고 미군들도 캘리포니아 주소를 사용하는 등 사실상 한국속의 미국이었다”고 말했다.

용산 미군 기지에 대한 거부감 등으로 이전 요구를 끊임 없었지만 87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용산 기지 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90년 한미 양국이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이전 논의가 시작됐다.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 관계자는 “두 나라가 용산기지 이전에 대해선 원론적으로 공감했지만 이전 비용 등을 둘러싸고 사업이 늦어졌다”며 “2003년 4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고 말했다. 용산기지 이전 사업에 들어간 8조9000억원은 한국이 부담했고, 60여년 동안 ‘용산합중국’으로 불렸던 이 곳에는 공원이 들어선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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