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웜비어 사망…대북 관계 복원 속도 조절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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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에 장기간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귀국 6일 만에 숨진 것은 북·미뿐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큰 악재다. 관광차 북한에 갔던 웜비어는 2015년 12월 정치선전물을 훔치려던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7개월 만에 혼수상태로 풀려났다.

한·미 정상회담 파행 위험 #북 인권문제 새삼 부각돼 #억류인사 추가 석방 필요

그의 죽음으로 미국에선 북한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다.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잔혹성을 규탄한다"고 밝힐 정도다. 미 국무부 역시 "부당한 감금과 관련해 반드시 북한에 책임을 묻겠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신체상 고문 흔적은 없다지만 멀쩡하던 22세 청년이 식물인간으로 돌아와 며칠 만에 숨졌으니 가혹 행위 때문이란 말이 나오고도 남을 상황이다.

이번 비극의 책임을 져야 할 북한은 어떻게 웜비어가 혼수상태가 됐는지 자세한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보위성의 고문과 가혹 행위 때문에 숨졌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울러 북한은 한국인 6명과 미국인 3명 등 현재 억류 중인 모든 인사를 풀어줘야 한다. 그래야 인권탄압국가라는 비판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윔비어가 숨지면서 우리에게 당장 닥친 문제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이다. 이 사건으로 문재인 정권 출범 후의 첫 정상회담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북한 문제를 두고 한·미 양국 간에 상당한 입장차가 존재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 정책을 중심축으로 삼아 중국을 통한 대북 제재에 공을 들이고 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 복원을 통한 북핵 해결에 갈수록 무게를 싣고 있다. 얼마 전 인도주의 차원의 민간 교류를 허용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19일에는 북한 태권도 시범단의 한국 방문을 승인했다.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는 형국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지연에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의 전략자산 및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발언으로 한·미 관계가 삐그덕거리는 판이다. 생각도 못한 일이 터지자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전을 윔비어 유족에게 전하는 등 나름 진화에 나서고는 있다. 하지만 웜비어 사망 이후 흘러나오는 청와대 측 발언을 들어보면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임에도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예정대로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주지시킬 계획이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미 대학생 사망 때문에 대북 기조를 흔들 수는 없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국제적 분위기를 읽고 남북관계의 강약을 조절하는 게 슬기로운 일이다. 가뜩이나 북한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북관계 개선에 앞장서 달라고 주문하는 게 옳은지 당국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