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한 걸음 내딛으니, 나락이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1호 30면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이후 딱히 떠오르는 이란 영화 감독이 없다면, 이제는 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내놓는 작품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스토리텔링의 귀재’라는 평을 듣고 있는 아쉬가르 파라디(45) 감독이다. 2009년 만든 ‘어바웃 엘리’는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는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남우주연상·황금곰상은 물론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까지 휩쓸었다. 2013년 발표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11일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신작 ‘세일즈맨’ 역시 지난 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영화 ‘세일즈맨’ #감독 : 아쉬가르 파라디 #배우 : 샤하브 호세이니 #타라네 앨리두스티 #등급 : 15세 관람가

이란의 고등학교 교사이자 연극 연출가인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는 배우인 아내 라나(타라네 앨리두스티)와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 중이다. 어느 날 그들이 사는 아파트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부부는 같은 극단 배우가 소개한 새 집으로 급히 이사한다. 하지만 아파트에는 전에 살던 여자의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느 날 집에서 혼자 샤워를 하려던 아내 라나는 벨소리를 듣고 남편이 귀가한 걸로 착각해 모르는 남자에게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욕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머리에 큰 상처를 입는다.

파라디 감독의 영화에서 불행은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무심코 저지른 실수나 조그만 악의를 갖고 한 행동이 일파만파로 퍼지며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과정을 그리는 데 탁월하다. 주인공들이 불행해지는 계기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나 오늘이나 내일 선택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기에 더 오싹하다. 라나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그날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경찰 신고도 거부한다. 부부는 이 사건을 “아무 일도 아니었다”며 잊으려 하지만, 서서히 관계에 균열이 생겨난다. 주차장에서 범인이 몰고 온 트럭을 발견한 남편은 복수심에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선다.

영화의 메시지는 하나로 압축하기 힘들다. “숨가쁘게 변화하는 사회 속 인간의 커다란 딜레마를 담길 원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복잡하게 얽힌 딜레마에 직면한 인간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지적인 엘리트인 에마드는 아내의 고통을 다 이해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사건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뇌한다. 에마드가 강한 집념으로 찾아낸 범인은 그가 생각했던 ‘악당’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내 전부에요”라고 외치는 부인을 기만한, 평범하고 비겁한 인간일 뿐.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에마드 부부는 복수냐 용서냐 라는 딜레마를 마주하고,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다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라디 감독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현대 이란의 풍경이 우리가 거쳐왔던, 혹은 거쳐가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등에서는 전통적인 가족관의 붕괴와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갈등과 좌절을 블랙코미디처럼 그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집은 늘 공사나 이사로 어지러운데, 이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직면한 이들의 내적 혼란을 보여주는 장치로 읽힌다.

‘세일즈맨’에서는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가 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극중극(劇中劇) 형식으로 보여주며 주제를 보다 분명히 드러낸다.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이 연극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란의 현재 상황과도 강력하게 맞물려 있다.” 지난 2월 열린 제89회 아카데미는 ‘세일즈맨’으로 파라디 감독에게 두 번째 외국어영화상을 안겼지만,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에 항의하며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리고 이런 편지를 남겼다. “나는 이 지구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 신앙들 사이에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훨씬 크다고 믿는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영화사 찬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