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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폭탄, 대청소, 대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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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정치부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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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으로 피해 갈 수 없는 ‘카톡 감옥’, 직업상 접하는 ‘뉴스 홍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일부러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가까운 국회의원들이 “문자폭탄 때문에 미치겠다”고 앓는 소리를 해도 솔직히 별 관심이 없었다. 과거 ‘이명박 청와대’에 출입할 때 ‘아침부터 XX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독자들의 욕설 메일 덕분에 길러진 맷집 때문인지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래? 기분 더럽겠네~”라고 성의 없이, 형식적으로만 의원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얼마 전 베스트셀러 에세이로 유명한 여성 작가가 받았다는 ‘언어 성폭력 쪽지’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문재인 후보가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에 대해 시니컬한 감상평 한 줄을 올렸다는 이유로 그 작가는 융단폭격을 당했다. 신문엔 절대로 옮길 수 없는 욕설에 여성 비하 표현이 가득한 내용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왜 “난 문자폭탄을 하루 1000건 이상(천상) 받는 천상클럽 회원”이라고 자조하는지, 왜 문자폭탄을 탈당의 이유로까지 거론하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그런 쪽지를 봤더라면 그 누구라도 ‘손가락 테러리스트’를 옹호할 수 없을 텐데 싶었다.

그런데 지난 3일 경선 승리를 확정한 문 후보와 TV 뉴스 앵커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앵커=“가장 아름다운 경선이라고 평가했지만 사실 지지자들 사이엔 그렇지 않은 모습, 18원 문자폭탄도 그렇고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 등 여러 가지가 문 후보 측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게 드러나기도 했다.”

▶문 후보=“뭐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죠. 우리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고요….”

누가 봐도 맥락상 오해를 하기 어려운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데도, 문 후보 측은 “여러 질문이 쏟아지면서 맥락을 잘못 알아들었다”거나 “문자폭탄이 경선 불복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알아들었다”는 해명을 했다. 파문이 커지자 결국 문 후보는 “제가 알았든 몰랐든, 제 책임이든 아니든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알쏭달쏭하게나마 사과를 했다.

문자폭탄에 대한 인식만이 문제는 아니다. 2012년 대선 패배 뒤 펴낸 책 『1219 끝이 시작이다』 속 문 후보는 지금과 달랐다. 패배의 원인을 솔직히 분석하며 “우리에겐 통합을 말하면서도 선을 긋고 편을 가르는 근본주의 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 그 근본주의가 우리의 기반을 넓히는 데 스스로 발목을 잡았다”고 썼다. 근본주의를 반성했고, 편 가르기를 후회했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를 거치면서 문 후보를 규정하는 단어는 다시 ‘대청소’와 ‘적폐 청산’이 됐다. 그런데 참모들에 따르면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뒤 이제는 다시 대통합 행보를 시작한다고 한다. 어제까지 대청소를 외쳤던 그가 왜 통합을 말하려 하는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자칫 3등으로 떨어질 줄 알면서도 ‘닥치고 대연정’을 외쳤던 안희정의 바보 같은 일관성이 차라리 그립다.

서승욱 정치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