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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꿈이 ‘부자 백수’인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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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이노베이션 랩장

김창규이노베이션 랩장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30여 명의 학생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부자 백수’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물론 학생 가운데 일부는 장난으로 이렇게 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학급의 상당수가 그냥 놀면서 돈만 쓰고 다니는 유형을 미래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있다니 씁쓸하다.

서울 강남은 국내 사교육 1번지로 불린다. 대부분의 학생이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대치동 학원가를 찾아 이곳저곳 순례를 한 뒤 밤늦은 시각에 녹초가 돼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심지어 초등학생은 너무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니기가 무거운지 여행용 가방에 책을 넣고 이 가방을 끌고 다니며 학원 문을 두드린다. 이 때문에 학원 수업 제한 시간인 오후 10시가 되면 이 일대는 학원을 마친 자녀를 태우고 가려는 학부모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교육열에 관한 한 세계 어느 곳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학생이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데 상당수 학생이 ‘꿈’은 없고 ‘돈’만 있기를 바란다. 어릴 때 꾼 꿈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인생을 밝히는 등대 역할을 한다는 말은 위인전 몇 권만 들춰봐도 나오는 내용이다. 위인전을 읽고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청소년이 이 정도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많은 청소년이 ‘부자 백수’를 꿈꾸는 건 창의력과 거리가 먼 주입식 공교육에 흠뻑 젖어 있는 데다 부모 손에 이끌려 여러 학원을 떠돌며 ‘영혼 없이’ 교육을 받고 있는 탓이 크다.

요즘 한국 경제는 유례없는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움츠러들고 있는 데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1년째 2만 달러대에 머물러 있다. 일부 기업은 이익이 크게 늘었는데도 회사 분위기는 가라앉다 못해 썰렁하다. 경제가 활력을 잃으며 나타난 현상이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혁신적인 기업이다. 혁신 기업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바꿔보려는 기업가정신에서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가정신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세계기업가정신발전기구에 따르면 경제 규모(GDP) 세계 11위인 한국의 2017년 기업가정신은 137개국 가운데 27위에 불과하다. 경제 규모가 각각 102위, 82위인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보다도 낮다. 20여 년 전만 해도 피터 드러커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세계 1위로 꼽았다.

기업가정신은 경영자만이 갖는 거창한 게 아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해보려는 끊임없는 도전정신이다. 대학에 가거나 사회에 진출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목표를 위해 끈기 있게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세, 즉 ‘꿈’ 속에서 기업가정신은 싹튼다. 내신 중심의 현재 교육은 학생에게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다. ‘도전과 실패’가 설 땅이 없다. 그런데도 요즘 대선 주자는 추상적이고 현실과 거리가 먼 교육 공약만 쏟아내고 있다. 청소년의 꿈이 없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김창규 이노베이션 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