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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재단, 거기 좋은 데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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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질문1 지난해 4월의 어느 날 밤. A씨의 전화기가 울렸다. 상대방은 박근혜 대통령. “그거 있잖아요, 코이카. 거기 이사장 연임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미르 문제점 추궁 소식에 #직접 걸려온 박 대통령 전화

코이카란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 김영목 이사장(차관급)은 경기고 출신이다. 동문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이 그의 연임을 밀었다. 인사안도 그렇게 올라갔다. 그걸 박 대통령이 틀었다. “그리고요, 거기. 예산에도 문제가 있대요.”

화들짝 놀란 A씨는 다음날 득달같이 달려온 김 이사장에게 따졌다. “당신 혹시 판공비 유용한 게 있느냐.” 김 이사장은 한숨을 쉬며 털어놓았다. “미르재단입니다, 미르재단. 황당한 사업 하겠다며 무작정 지원 요청을 하길래 거절했어요. 그것뿐인데….” 결국 김 이사장 연임안은 박 대통령의 전화 한 통으로 날아갔다.

최순실의 미르재단을 돕지 않은 괘씸죄, 아니 적절한 판단이 ‘예산 문제’란 누명을 씌워 돌아온 기가 막힌 현실을 대통령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 대통령이 ‘엮인 것’인가, 분위기 파악 못 한 김영목 같은 공무원이 엮인 것인가.

#질문2 비슷한 시기 B씨의 회상. 대통령의 이란 국빈방문을 앞두고 외교라인의 불만이 고조됐다. 미르재단이 감 내놔라, 배 내놔라. 온갖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참고 참던 외교 인사가 B씨에게 하소연했다. “혹시 미르재단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문화사업을 하는 곳인데, 해도 너무 합니다.” 화살은 돌고 돌아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향했다. ‘경고’를 접한 김 수석은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고 물러섰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B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상대방은 놀랍게도 박 대통령. “오늘, 미르재단 이야기 하셨다면서요?”

‘얼음’이 된 B씨는 순간 김상률 수석을 떠올렸다. “고자질했구나….” B씨에게 박 대통령은 대못을 박았다. “미르재단, 거기 좋은 데예요.”

대통령은 미르의 수호신이었다. 누구도 미르재단의 ‘ㅁ’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래놓고 “난 미르재단으로부터 아무런 사익을 취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로 둔갑했다. 돈을 안 받으면 아무런 책임을 안 져도 되는 게 이 나라 대통령의 특권이란 말인가.

#질문3 최근 미국의 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얼마 전 CNN을 보니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우리 성조기를 흔들고 있던데, 왜 그런거냐.” 말문이 막혔다. 누구는 종북·좌빨의 반대어가 친미라 한다. 하지만 영장실질심사가 열리는 법원 앞까지 등장한 성조기는 설명이 안 된다. 미 광우병 시위도,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선이·효선이 관련 시위도 아니다. 미국 관련성 제로다. 미국의 동맹 일본의 극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한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필리핀에서도 ‘반미 시위’에나 성조기가 등장한다. 세계 11위 경제대국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란 말인가. 트럼프의 미국은 절대선이란 말인가. 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성조기를 흔드는가.

미국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 전 하버드대 교수는 “우리는 질문을 통해 모든 해답을 배운다”고 했다. 지난 100여 일의 혼돈 속에서 우리도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얻고 배웠다 생각한다.

대한민국 공무원과 국민 모두 더 이상 무책임한 지도자에 엮이는 ‘악의 평범성’이란 블랙홀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며, 대선 주자들도 서투른 코스프레 따위는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됐음을 통감했을 것이다. 성조기를 흔든 이들도 이제 무분별한 깃발을 내릴 때임을 알았을 것으로 본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탄핵심판 이후의 내전을 모두 걱정한다. 하지만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고 분열로 치달아 몰락한 ‘아랍의 봄’처럼 우리의 ‘뜨거웠던 겨울’이 어리석고 미성숙하진 않을 것이라 믿는다. 대한민국, 대한국민의 미래와 양식이 시험대에 섰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