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살려 경기부양’ 연결 고리 끊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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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직장인 강명우(37)씨는 지난 6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전용면적 84㎡ 아파트를 살 때만 해도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이 컸다. 금리가 낮아 집값의 50%인 2억4000만원을 대출받긴 했지만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씨 부부는 대출금을 빨리 갚으려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최소한의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 등을 빼고 모두 원리금 상환에 썼다. 매달 이자와 원금 상환으로 쓰는 돈은 200여 만원. 좀처럼 오르지 않는 홀벌이 월급으론 부담이 큰 상황이다. 강씨는 “가끔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 산다는 느낌이 든다”며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면 집을 되팔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 진단
담보대출 증가로 소비 여력 줄어
금융·실물 경기 ‘디커플링’ 구조화
기준금리 내리고 대출 규제 완화
정부·한은 ‘전통 정책’ 처방 안 먹혀
“DTI 규제, 기업에 유동성 공급 필요”

‘금리를 내리고 대출 규제도 풀어 부동산 시장을 끌어올리면 경기도 살아난다’. 박근혜 정부 내내 경제부처가 고수했던 대책과 논리다. 얼마나 효과를 봤을까. 한국은행은 금리를 낮추고 금융사를 통해 돈을 풀어도, 집값이 오르고 주택 거래가 활발해져도 경기는 오히려 나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금융·주택·실물 경기 간 순환 고리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한은이 이런 내용의 금융안정보고서를 27일 국회에 제출했다. 한은은 한은법에 따라 매년 두 번 경제 전반이 어떤지 평가한 금융안정보고서를 국회에 내야 한다. 이날 나온 건 지난 6월호에 이은 12월호다.

한은은 국내 지표와 국제통화기금(IMF)·국제결제은행(BIS) 통계를 가지고 ‘경기 사이클 동조화 지수’를 산출했다. 국내 금융 경기, 주택 가격, 실물 경기가 하강하고 상승하는 순환 주기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수치로 나타냈다. 1이면 똑같은 방향으로, 0이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0년부터 2008년까지만 해도 금융과 실물 경기 간 동조화 지수는 0.69였다. 주택 가격과 실물 경기 사이 동조화 지수도 0.75에 달했다.

어느 정도 엇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여왔다는 의미다. 금융위기 이후 상황은 반대로 바뀌었다. 2009년부터 올해 2분기까지 수치를 한은에서 뽑아봤더니 금융·실물 동조화 지수는 0.23, 주택·실물 동조화 지수는 0.40으로 추락했다. 금융·주택 경기와 실물 경기가 서로 반대로 움직였다. 한은과 정부는 경기 둔화에 대응한다며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대출 규제를 푸는 ‘오래된 칼’을 그대로 썼다. 바뀐 경제 구조에 맞지 않는 처방이라는 게 한은 분석의 핵심이다. 이번 연구를 맡은 이승환 한은 금융안정연구팀장은 “저금리, 부동산 규제 완화 영향으로 가계신용(빚)이 급증한 게 금융·실물 사이클 간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며 “주택담보대출 증가가 가계의 소비 여력을 제약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빚은 규모와 질 모두 문제다. 가계와 기업이 진 부채(민간 신용)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2배 규모로 늘었다. 한은 통계를 보면 명목 GDP 대비 민간 신용 비율은 올 3분기 197.8%로 올라서며 최고치를 경신했다.

또 올 3분기 기준 3곳 이상 금융사를 통해 ‘빚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사람(다중 채무자)은 전체 대출자 가운데 30.7%에 달했다. 다중 채무자면서 신용등급 하위 30%(7~10등급) 또는 소득 하위 30%에 속하는 취약 차주는 전체 대출자 중 8%를 차지했다. 한은은 이들이 대출받은 금액을 78조6000억원으로 추정했다. 취약 대출 통계를 한은에서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신호순 한은 금융안정국장은 “저신용·저소득에 다중 채무를 지고 있는 대출자는 은행보다 상대적으로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큰 상호금융·저축은행·대부업체 등을 많이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금리가 더 오르면 터질 수 있는 ‘부실 뇌관’이다. 미국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시동을 걸면서 시장금리는 이미 상승세를 탔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과도한 밀어내기식 주택 분양과 대출 확대가 금융·실물의 안정성을 훼손하는 주요인”이라며 “분양 규제,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환 한은 팀장은 “경기 대응 차원에서 확대된 유동성이 기업 등 생산적 부문으로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미시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현숙·황의영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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