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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악수, 바카라에서 보이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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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도널드 트럼프는 악수하기를 싫어합니다. 경선 초반 유세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카리스마’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더군요. ‘깔끔 손 결벽증’이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가장 많이 하는 게 손 씻는 거랍니다. 악수 문화를 ‘야만적’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확 달라졌습니다.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악수를 마다하지 않더군요.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악수를 안 하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지 스스로 깨닫고 납득했다.”

트럼프는 승부사입니다. 1990년 당시 전 세계에서 ‘고래(whale)’라 불리는 거액 배팅 도박사 3명이 있었답니다. 그중 한 명이 일본인 가시와기 아키오. 그는 90년 2월 트럼프가 운영하는 ‘트럼프 플라자’를 찾아 이틀 동안 600만 달러, 요즘 환율로 72억원을 벌었습니다. 화가 난 트럼프는 바로 3개월 뒤 가시와기를 다시 초청합니다. 그리고 직접 ‘바카라’ 대결을 펼쳤습니다. 6일간의 사투 끝에 트럼프는 복수에 성공합니다. 1000만 달러(약 120억원), 즉 잃은 돈의 거의 두 배를 찾아온 겁니다. 무서운 집념을 보여 줍니다.

대선 후 한 달 반. 서서히 트럼프 스타일의 윤곽이 잡힙니다. 위에 언급한 대로 그는 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고, 자녀와 사위 빼고는 남의 말을 오래 못 듣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남는 장사이고, 납득만 되면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일본은 ‘트럼프 패밀리’를 잡는 전략을 택한 듯합니다. 뉴욕 법조 인맥을 통해 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잡았다는군요.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대사가 직접 통화까지 한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못 간 듯합니다. 그렇다면 트럼프 스스로 ‘납득하게’ 하는 수밖에요. 취임 초부터 사드 배치, 북핵 대처 방안, 통상압력 등 뭐 하나 녹록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 대통령은 저 모양입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의 한 줄이 트럼프 변방 인사 100번 만나는 것보다 낫다는 게 트럼프 주변의 조언입니다. 미국 내 여론을 통해 우리 입장을 설득력 있게 소개하는 노력이 절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대사관엔 그 역할을 지휘할 이가 없습니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 때 홍보공사 자리를 없앴기 때문입니다. 한심하고 기이한 일이지만 그게 우리 근시안 외교의 현실입니다.

성탄절 이브에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했나요. 괴물 취급받는 트럼프이지만 얼마 전 부인 멜라니아와 아들 배른(10)이 당분간 백악관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이유를 전해 듣고는 가슴이 짠했습니다. 공표는 않고 있지만 배른은 자폐 증세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들의 급격한 환경 변화를 우려한 트럼프 부부가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더군요. 누구나 말 못할 고민과 마음의 응어리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겁니다. 연민의 정이 들었습니다. 2016년도 앞으로 1주일. 주변의 범사에 감사하는 포근한 연말이 됐으면 합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