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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번 관료의 1호차 탑승이 부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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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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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힐러리 클린턴의 ‘외교안보 3인방’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커트 캠벨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로부터 최근 재미있는 일화를 직접 들었다.

2012년 11월 오바마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시 캠벨은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 동승했다. 두 달 뒤 퇴임을 앞두고 있던 캠벨은 기내에 있는 대통령 문장이 박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몰래 호주머니에 담았다. 사탕·볼펜·냅킨·카드는 물론이고 재떨이와 손전등까지 챙겼다고 한다. 미얀마 착륙 후 캠벨은 거의 제일 끝인 45번째 차량을 배정받았다.

서열 순이었다. 해외순방의 경우 차량행렬을 놓치면 낭패인 걸 잘 아는 캠벨은 전력질주했다. 그런데 건장한 경호요원 2명이 “미스터 캠벨!”을 외치며 쫓아 달려오는 게 아닌가. 캠벨은 “아뿔싸! 에어포스원에서 훔친 게 들통났구나”라고 생각하곤 더 빨리 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경호요원에겐 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멈춰서 호주머니 속 물건들을 꺼내며 ‘자수’하기로 했다. 그 순간 경호원이 하는 말, “미스터 캠벨, 대통령께서 같은 차에 타잡니다. 빨리 가시죠.” 캠벨은 다시 호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오바마 차량을 향해 정신 없이 달렸다고 한다.

깔깔 웃고 넘어갔지만 의미심장한 얘기였다. 1호차에 장관, 백악관 보좌관도 아닌 서열 45위의 ‘실무 차관보’가 옆에 탄다고? 우리 같았으면 발칵 뒤집어질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지인으로부터 “요즘 신문에 나는 ‘총리 동정’란을 한번 꼼꼼히 보세요. 최근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등 일본 외교가 왜 잘나가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는 말을 들었다. 확인해 보니 지난 1일부터 27일까지 주말 및 지방출장 기간을 제외한 12일 동안 아베는 외무관료들과 무려 18번을 따로 면담했다. 압도적으로 많다.

주목할 건 아베가 그 기간 만난 외무관료의 절반은 국가안전보장국장·사무차관 같은 고위간부가 아니라 국장급이란 점이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유연한 사고가 없인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온갖 다양한 아이디어와 전략이 나오고 그 속에서 외교 개가도 나온다.

우리 사정은 어떤가. ‘45번 외교 실무자’의 1호차 동승이나 대통령과의 솔직한 의견교환은 언감생심. 장관조차 대통령 따로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하니 말이다. 직언도 여기저기서 자주 들어야 자연스럽게 조언으로 들리지,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만 읽다 불쑥 직언을 들으면 ‘반역’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대통령 주변이 할 말을 못하고 충성심 경쟁으로 치닫는 이유다.

지난 2월 개성공단 중단 정부 발표문을 조정할 당시 한 외교 수뇌부 인사가 “대통령님께서 제게 이렇게 친필로 ‘폐쇄’라 써서 지침을 주셨단 말입니다. 그러니 따라야죠”라 우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외교의 현주소다. 그러고 보니 ‘한국 외교의 개가’란 뉴스를 들은 지도 참 오래된 것 같다.

김 현 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