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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가 알려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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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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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23일 베이징 주재 외신기자들 앞에 선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국장의 표정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필자는 2007년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김계관 당시 외무성 부상을 인터뷰하면서 최 부국장과 잠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수행원 겸 통역 신분이던 그는 김 부상의 항공권 수속 등을 거들 뿐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9년 뒤 ‘미니 6자회담’이라 불리는 동북아협력대화(NEACD)에 북한 대표로 나와 6자회담 수석대표들 면전에서 “6자회담은 죽었다”고 공언할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

그의 발언 중에 내가 주목한 부분이 두어 군데 있다. “예전과 달라진 중국의 대북 정책에 실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전혀 실망하지 않는다. 중국은 중국이 할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국제사회의 제재에 대해선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역대 ‘최강력’ 제재에 중국이 동참했으니 북한이 두 손 들고 나오거나 최소한 아주 곤혹스러워 하리란 예상(혹은 희망)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틀 전 공개된 북·중 간 무역 통계를 봐도 제재 전과 후 북으로 흘러 들어가는 외화 총액은 큰 차이가 없다. 북한의 대중 석탄 수출은 28% 줄었지만 철광석 수출은 오히려 46% 늘었다. 광물 수출 총액에서 축이 난 부분은 지난해의 두 배 이상 늘어난 의류 수출로 벌충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대북 제재는 시간이 갈수록 흐지부지된다는 게 경험칙이다.

북한이 중국에 실망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왜 나왔는지도 회의장에서 우다웨이(武大衛) 중국 대표가 한 얘기를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그는 비핵화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의 동시 시작을 주장했고 러시아도 이에 동조했다. 북한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한·미·일이 받아들이기엔 한참 많이 나간 입장이다. 한 참석자는 “한·미·일과 중·러 간에 현저한 입장차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요컨대 북핵 문제 관련국 간에는 5대1이 아니라 3대2대1의 구도가 형성돼 있는 셈이다. 북한으로선 중국이 예전과 달리 까칠하게 나오는 게 못마땅하겠지만, 어쨌든 한·미·일과 다른 목소리를 내며 5개국의 일치단결을 막아주니 굳이 실망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속내를 최선희 부국장이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3대2대1을 5대1의 구도로 바꾸는 게 우리 희망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변수까지 끼어들면 중국 설득은 더욱 어려워진다. 25일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에 와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사드 반대에 한목소리를 낼 전망이다. “사드 배치를 거론할 필요가 없도록 북한에 핵 포기 압력을 가해 달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그들은 북한 체제의 사활에 영향을 주는 수준으로 몰아붙이는 걸 꺼린다. 그건 김정은 정권이 곱고 미운 것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초강력 대북제재가 시작된 지도 4개월이 다가온다. 지금 이 구도가 굳어지면 북한만 시간을 번다. 그게 오랜만에 국제무대에 나타난 최선희가 알려준 사실이다.

예 영 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