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2만 명 중 문인은 단 1명, 그들의 삶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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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화교 등단 문인인 우매령씨. 최근 수필집 『아버지와 탕후루』를 출간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들은 이 땅에서 무려 130년이나 살았다. 우리 현대사의 ‘타자(他者)’를 꼽는다면 1순위에 놓여야 할 화교들 말이다. 많을 때는 10만 명에 이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동안 글 쓰는 문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얘기다.

국내 첫 화교 등단작가 우매령
수필집 『아버지와 탕후루』 출간

화교 수필가 우매령(于梅玲·45)씨는 그런 어두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네 살 때 산둥성에서 건너온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2013년 계간지 ‘창작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도 됐다. 현재 국내 화교사회가 인정하는 첫 등단작가란다.

그가 최근 수필집 『아버지와 탕후루』(범우)를 출간했다. 탕후루(糖葫蘆)는 산사나무 열매 등을 꼬치에 꽂은 후 설탕물을 발라 굳힌 중국 북방지역의 간식이다. 말 그대로 손 가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교로서 느껴야 했던 자신의 어려움과 부모 세대의 기억, 고통을 주로 쓰게 됐다는 얘기다. 탕후루는 생전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간식이라고 한다.

책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짐작할 뿐 자세히는 몰랐던 화교 사회의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국내 화교의 출발점은 1882년 임오군란이다. 일제에 맞선 명성황후가 도움을 요청하자 출병한 청나라 군대와 함께 조선땅을 밟은 40여 명의 군역상인이 최초의 화교다. 당시 청나라 해군제독 오장경(吳長慶)을 기리는 사당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가 한때 ‘원세개(袁世凱) 사당’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서울 동대문 부근에 방치돼 있다시피하다 지금은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뒷산으로 옮겨 신축돼 있다. 한데 오장경을 기리는 기일 제사에는 주한대만대표부 외교관이 배석한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강력한 반공 방침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 있던 화교들에게 일률적으로 대만국적을 준 탓이다.

화교들의 춘계 여행 때는 반대다. 중국대사관이 참석한다. 중국과 대만 양국이 그렇게 교통정리 했다. 지난 24일 만난 우매령씨는 마침 오전에 오장경 기일 제사를 드린 참이었다. 그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들과 구분해 이전부터 살던 화교를 구화교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구화교에 신화교, 한·중 수교 이후 일자리를 찾아 쏟아져 들어온 중국말 능통한 중국동포(조선족) 사이에 미묘한 오해와 갈등 기류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우매령씨는 외국인 할당을 이용해 서울대 중문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된 후 건설일에 뛰어 들었다. 15년간 동생과 함께 건설 중장비 임대업을 하며 생활해 왔다. “올 하반기 중국으로 건너가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며 서툰 중국어를 가다듬은 다음 중국문학 석·박사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학교를 다닐 때 애국가를 부르는 시간이 되면 따라 불러야 할지 망설였던 화교 소녀가 본격적인 뿌리 찾기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현재 구화교는 한국 정부의 출입국관리소에는 2만 명쯤이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1만 명”이라고 했다. “이재에 밝아 잘 산다는 얘기도 옛말이어서 형편 어려운 사람이 많고 중국이나 대만국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약해 차츰 숫자가 줄고 있다”고 소개했다. “세금은 한국인과 똑같이 내는데도 각종 복지혜택을 받지 못한다.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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