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제대로 내셔야죠? 18조 짜리 '임'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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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소매업을 하는 A법인은 지난해 법인세 신고를 잘못해 적지 않은 가산세를 물었다. 임직원이 골프장이나 피부미용실 등에서 사용한 법인카드 사용 금액을 복리후생비로 잘못 처리했다가 세무서 사후점검에 적발됐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국세청이 홈페이지(홈택스)를 통해 법인카드 사적 사용 내역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새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비용 처리를 해선 안 되는 항목을 구분해 신고할 수 있었다.

임환수 청장, 취임 때 “약팽소선”
세무조사 아닌 자진신고에 초점

#. 사업가 B씨는 올해 1월 국세청으로부터 면세사업자·간이과세자로부터 매입한 신용카드 매출전표 등의 내역을 우편으로 안내 받았다. B씨는 이를 검토해 부가가치세를 신고했다. 지난해 B씨는 연 매출이 4800만원 미만인 간이과세자에 해당하는 한 식당에서 쓴 비용을 공제해 신고했다가 세무서 점검에 적발돼 부가가치세와 함께 신고불성실 가산세까지 물었다. 간이과세자로부터 받은 신용카드 매출전표는 공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B씨는 “올해는 간이사업체로부터 매입한 내역을 알 수 있어 정확한 세금 신고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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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환수 국세청장은 2014년 8월 취임식에서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고사를 화두로 던졌다. 생선을 익히려고 자꾸 뒤집다 보면 오히려 생선살이 다 부서져버리듯 지나치게 세정 간섭을 하면 기업이 위축되고 그 결과 세수가 더 감소한다는 뜻이었다. 조사국장을 6번이나 역임한 국세청 대표 ‘조사통’의 취임 일성으론 파격이었다. 임 청장은 취임 이후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사후 세무조사보다 사전 자진신고 활성화에 초점을 맞췄다. 전체 세수의 90% 이상이 자진신고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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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이 홈택스를 통해 제공한 ‘법인세신고도움서비스’. 납세자는 항목 4의 ‘신용카드 사용현황’에서 법인카드를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내역을 볼 수 있다. 이 액수는 업무와 무관한 것으로 비용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 [사진 국세청]

이를 위해 납세자가 일일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나 실수하기 쉬운 항목을 사전에 안내하기 시작했다. 고소득자에게는 불성실 신고 사례를 안내하며 ‘경고’ 시그널을 보냈다. 지금까지 ‘유리지갑’으로 불린 일반 직장인에 비해 빠져나갈 구멍이 컸던 법인이나 개인사업자의 탈루 가능성을 보다 촘촘하게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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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국세청

그 결과 정부는 지난해 4년 만에 ‘세수 펑크’에서 벗어나며 사상 처음 200조원 이상 세금을 걷었다. 올해도 4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18조원 늘어난 96조9000억원의 세수 실적을 올렸다. 같은 기간 예산 대비 세수 진도율은 43.5%로 지난해 같은 기간(36.5%)보다 7%포인트 앞섰다. 통상 세수는 경기 상황과 직결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세수 실적이 이처럼 호전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경기 부진 속에 기업이 덩치를 늘리는 대신 수익성 확보에 중점을 두면서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 법인세가 많이 걷혔다. 비과세 감면 혜택을 줄이고 담배 개별소비세를 신설한 영향도 컸다.

그러나 이런 요인만으로는 최근의 세수 호조를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국세청 관계자는 “세법 개정과 경제적 요인에 의한 세수 효과 이외에 자발적 성실신고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게 세수 실적으로 직결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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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국세청

실제 납세자에게 제공하는 국세청의 성실신고 안내자료는 갈수록 꼼꼼해지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 3월 ‘홈택스’의 법인세 신고 도움서비스를 통해 법인 11만 곳에 20개 항목에 달하는 법인세 성실신고 안내자료를 제공했다. 전년(법인 6만곳에 15개 항목 제공)보다 제공 범위를 늘렸다.

여기에는 최근 3년간 법인세 신고내용을 비롯해 각종 매출 및 체납 현황뿐만 아니라 신고 시 유의 사항이 담겨있다. ▶사적인 법인카드 사용 ▶상품권 과다 구입 ▶허위 인건비 계상과 같은 내용이다. 고의 혹은 부주의나 세무 상식 부족 등으로 빚어지는 허위 신고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부가가치세도 마찬가지다. 올 1월 70만명이 75개 항목에 이르는 사전 안내자료를 우편을 통해 받았다. 국세청은 규모가 큰 사업자나 고소득 전문직에게 불성실 혐의사항 위주로 안내자료를 제시했다. 매출누락이나 부당환급 등의 사례다. 탈루 가능성이 큰 고소득자에게 이런 식의 탈세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보낸 셈이다.

세무 지식이 부족해 자칫 실수로 신고를 잘못할 소지가 있는 영세사업자에게는 법령상으로 공제를 받을 수 없는 매입세액 공제자료를 제공했다. 예컨대 면세·간이사업자로부터 받은 매입 자료는 공제가 안 된다는 식의 내용이다. 국세청은 마찬가지로 5월에 종합소득세를 내야 하는 58만명에게 재무제표 분석자료 등 60개 항목의 전산분석 자료를 사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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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국세청

이런 정책이 가능한 건 20년 넘게 사용하던 국세행정시스템을 지난해 2월부터 차세대 국세행정통합시스템(NTIS)으로 바꿔 체계적으로 세수관련 자료를 확보·분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세대 시스템을 통해 ‘빅데이터’로 무장한 국세청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납세자와 세무 대리인의 생각도 달라졌다. 어떻게든 편법을 써서 세금을 덜 내려는 ‘의지’가 크게 줄었다.

A세무법인에서 일하는 김지훈(38)씨는 “국세청의 성실 신고 유도로 고객들의 허위 신고 의지가 크게 줄었다”라며 “과거 편법적인 탈세를 유도하던 일부 세무대리인 역시 성실신고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국세청은 이런 관리방식을 위해 지난해 기획·세무조사 인력을 200명 이상 줄여 세무서의 성실납세 지원인력으로 배치했다. 이 결과 2013년 1만8000건이 넘었던 세무조사는 2014년 이후 1만7000건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올해도 이 정도의 세무조사를 시행한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사후 검증도 지난해 3만3130건으로 전년(7만1277건)보다 53.5% 감소했다. 정부 관계자는 “국세청의 과세인프라가 확충되고 성실납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자진 납세율은 높아지고 사후 검증은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경기 부진이 이어지는데다 고령화 등의 구조적 여인으로 세입 여건은 점차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세정 당국이 보다 촘촘하게 세원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박형수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성실납세 안내가 세수 확충에 기여한 건 사실”이라면서 “향후 경기 상황 등을 비쳐 보면 세수 여건이 만만치 않고 이렇게 되면 성실납세에 따른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성실납세를 강화하겠다는 방향은 맞다”면서도 “아직도 일부 고소득 자영업자 등이 법망을 피해 탈세 행위를 벌이고 있는 만큼 제도 개선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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