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화장실 비상벨 울리자 3분도 안 돼 온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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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모란
사회부문 기자

지난 23일 오후 8시30분쯤 인천시 남구 용현동 용남공원에 있는 남녀 공용 화장실. 문을 열자 악취가 풍겼다.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 벽을 더듬어 입구에 설치된 비상벨을 눌렀다. “삐-삐-삐-” 하는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벨을 누르고 시간을 분초 단위로 재봤다. 2분30초 만에 순찰차가 출동했다.

누르면 5분 내 지구대서 출동하는
방범 비상벨 인천 내 30곳 설치
“최소한의 안전대책…더 확대를”

기자가 직접 눌러본 ‘공원 여성 화장실 방범 비상벨’은 인천지방경찰청이 지난해 10월부터 설치한 보안 장비다. 버튼을 누르면 경고음이 울리고 자동으로 112 상황실과 지역 폐쇄회로TV(CCTV) 관제센터 등으로 신고가 접수된다. 신고를 받은 관할 경찰 지구대는 5분 안에 출동해야 한다.

인천 시내에 비상벨이 설치된 공원 화장실 30곳 중 3곳을 1박2일간 점검했는데 모두 버튼을 누른 지 2~3분 만에 경찰이 도착해 일단 합격점을 줄 만했다.

현장에서 만난 인천 남부경찰서 학동지구대 서온수 경위는 “비상벨이 설치된 지역만 담당하는 전용 순찰차가 있기 때문에 늦어도 2~3분이면 현장에 도착한다”며 “화장실 입구 등을 바로 비추는 CCTV가 별도로 설치돼 있어 용의자가 달아나도 신속히 검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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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34)씨가 24일 오전 현장검증을 위해 사건이 일어난 서초동 소재 건물로 들어서고 있다. 김씨는 유가족들에게 할 얘기가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피해를 당한 유가족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사망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은 없었는데 어쨌든 희생이 됐기 때문에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은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검증에서 경찰은 김씨의 범행수법 등을 살폈다. [사진 김현동 기자]

경찰이 화장실에 비상벨을 설치한 이유가 있다. 밤 늦은 시간에도 공원을 찾는 사람은 많은데도 상당수 화장실이 공원 외곽의 한적한 장소에 설치돼 있어 비행청소년이나 노숙자가 자주 드나들어 여성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천여성가족재단이 지역 여성 12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동네시설 안전도 조사’(5점 만점)에서 공원은 2.67점, 공중화장실은 2.69점으로 최저점을 받았다. 아파트 승강기와 지하 주차장(각 2.99점)보다 안전도가 낮아 여성들의 불안감이 컸다.

이에 따라 경찰은 방범 비상벨과 CCTV, 보안등을 추가로 설치하고 주변 순찰도 강화해 범죄 예방에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각 지자체와 공공기관들도 화장실 안전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경기도 성남·안산·군포시 등은 공원 화장실에 비상벨을 설치했거나 추진하고 있다. 급기야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5층 여자화장실에는 ‘스마트 세이프 화장실’이 설치됐다. 위기 상황에서 비명을 지르면 사이렌이 울리고 관리실과 112 상황실로 신고가 접수된다.

하지만 안전 사각지대로 방치된 화장실은 전국 각지에 많지만 비상벨 확대 설치에는 예산 부담과 장비관리 문제 등 장애물이 적지 않다. 인천시의 경우 전체 공원 605곳의 4.9%인 30곳에만 비상벨이 설치돼 있다.

물론 비상벨이 여성 대상 범죄를 막을 만능의 무기는 아니다. 당연히 순찰 강화와 경찰의 신속한 출동 등 실질적인 행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일각에서는 주요 범죄 대상이 되는 여성 등 피해자보다는 취객 등이 장난이나 실수로 비상벨을 누르는 빈도가 많다며 ‘예산 낭비’라는 지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강남역 10번 출구 쪽 노래방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놀란 다수 시민들은 “비상벨 같은 최소한의 안전 대책이라도 더 많이 마련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천 남동구에 사는 김지혜(23·여)씨는 고등학교 다닐 때 늦은 시간에 혼자 공원 화장실에 들어갔다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요즘은 화장실 앞에 ‘CCTV 작동 중’이라고 적힌 표지판도 있고 비상벨도 있어 이전보다는 많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같은 여성인 기자의 생각도 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최모란 사회부문 기자
사진=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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