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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내리막길에 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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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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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얼마 전 영화 ‘사도’를 봤습니다. 올 하반기 런던한국영화제를 앞둔 맛보기 상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때가 때인지라 한 구절이 와서 박혔습니다. “왕이라고 칼자루만 쥐고 신하라고 항상 칼끝만 쥐는 게 아니다. 왕이라도 실력이 모자라면 칼끝을 쥔다.”

신하가 국민으로, 민심으로 들렸습니다. 선례는 차고도 넘칩니다. 1세기 로마의 갈바는 “그저 한 개인으로 남아 있기엔 너무 탁월해 보였다”(『타키투스의 역사』)던 인물입니다. 종국엔 황제가 됐으나 7개월여 만에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암살됐습니다. 15세기 4년여간 세속적인 피렌체를 종교적 열망으로 가득 채운 사보나롤라도 단 하루 만에 몰락합니다. 불속을 걷는 이른바 ‘불의 심판’을 꺼린 탓인데 ‘프로페타(예언자)’가 곧 사기꾼이 되고 결국 불속에서 죽어갑니다(화형). 이를 지켜본 29세 청년은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를 차지할 수 있으나 말뿐인 예언자는 멸망하고 만다”고 썼습니다.

목숨이 오가지 않을 뿐 요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은 종전 후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합니다.

신화학의 고전인 『황금가지』엔 인간신의 살해가 반복적으로 다뤄집니다. 신의 반열로 추앙받던 이들의 잔혹한 말로입니다. 권력의 운명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정도 차는 있지만 우리도 1980년대 이후 5년마다 반복 경험한 일입니다. 익숙하다고 덜 고통스럽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권력 내부는 이런 감정 상태일 겁니다. 늘 이해할 준비가 돼 있던 민심이 오해할 태세로 돌변했다고. 선의는 악의로, 노력은 집착 내지 발악으로 곡해된다고. 이에 비례해 내부는 분노와 배반·허탈·상실 등 자기파괴적 감정에 사로잡힐 겁니다. 누군가 택시기사에게 “청와대로 가자”는 대신 “삼청동으로 가자”고 말할 날도 오겠지요. 그나마 여력 있는 이들이 탈출하면서 더 침잠할 터이고. 유일한 심리적 부표는 ‘역사는 이해해 주겠지’란 막연한 가정뿐일 겁니다.

그러다 또 깨닫게 될 겁니다. 미움이 조롱·무시보단 호의적 감정이란 걸요. 권력자를 향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때가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걸고 있는 때란 걸요. 이내 자신들의 존재를 부인당하거나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단계까지도 전락할 수 있다는 걸요. 숙명입니다. 물론 추락의 속력을 늦출 순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는 대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요. 밖의 목소리를 듣는다면요. 그럴 수 있을까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