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을가다<2>-한일국교정상화 20년 맞아 다시찾아본 무면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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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조선통신사의 선단이 대마도 북단을 지나 ,뱃머리를 남으로 돌려 대마해협으로 빠져들면 풍광의 기운은 일전한다.
통신사 신유한공 일행이 도요우라(담포)서 떠나 니시도마리(서박)로 향한것은 한양(서울)을 떠난지 72일, 부산을 떠난 지 4일째되는 날이었다.
취재팀은 대마도 북단을 동으로 돌아 곧바로 니시도마리에 도착했다. 니시도마리는 히다가쓰(비전승)만의 입구 우측에 연해있다.
동·북·서 3면을 나직이 둘러싼 산아래 둥근 수면이 거울처럼 맑다. 호수와도 같이 잔잔한 만안에 떠있는 두점의 작은섬이 그림 같다. 소항의 즐비한 오징어배 사이로 수십마리의 매떼가 원을 그리는 정경이 이채롭다 신공은 그때 부사가 더위를 먹어 상륙해서 조리를 하고자 하므로 서복사로 갔다고 적고있다.
신공의 기록대로, 역시 민가를 돌아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서복사는 거기 있으나 옛절이 아니었다. 작은 새건물뿐 있었다던 암자는 없었다. 다만 양쪽에 버티고 서있는 두그루의 우람한 은행고목만이 당시의 사연을 안으로 새기고 있는 것인지.
서복사에서 바라보니 왼편 언덕위에 자리잡은 국민숙사 「상대마장」이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국민숙사는 전국 곳곳의 경승지에 자리잡은 대중용 숙박시설로 싸고 편리하게 꾸며져 있다.
『당시 해로에서 통신사의 숙박시설은 그리 좋은 편은 못됐읍니다. 통신사들이 매년 오는 것도 아니고 10년내지 30년마다 오기도 했으므로 그때마다 객사를 다시 마련해야 했지요. 객사는 보통 넓은 공간의 절간이나 해변가에 마련했는데 모든 인원을 수용할수 있는 대시설을 갖춘곳은 흔치 않았고 풍랑을 피해 작은 항구에 들어가면 배위에서 자기 일쑤였습니다』

<10∼30년만에 내왕>
동행한 이진희교수의 말이다. 신공은 『광풍이 휘몰아쳐 언덕위의 나무들이 다 부러지고 사관의 건물도 기울어지고 파괴된』적이 있으며 『지붕과 집이 풍우에 마구 흔들리고 기와가 뒤집히고 돌이 날아가기고 했다』고 기록하고있다.
마침 연휴를 맞은 관광객들이 가족단위로 몰려들어 아늑한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 히다가쓰와 본토의 고꾸라 (소창)를 왕래하는 카 페리를 통해 알뜰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좌측으로 연해있는 히다가쓰항은 천연의 양항으로 최근 대마도에서 가장 활기를 띠는 항구의 하나. 북부 대마의 중심지다. 최근 세운 대규모 오징어가공 공장은 바로 한국어민들이 잡은 오징어로 가동되고 있다고 이교수는 들려준다.
신공은 니시도마리를 떠나며 점차 낯익어가는 이국의 정취를 음미하면서도 고국은 더욱 멀어져가니 집생각도 났음직하다.
신공은 지난여정을 돌아본다. 그는 통신사의 3사 (정사 홍치중, 부사 황선, 종사궁 이명음)를 모시는 제술관에 뽑히고 나서 그일의 고단함을 이렇게 적고있다.
『왜인들이 문자를 좋아하는 버릇이 근래에 와서 더욱 성해져서 떼를 지어 연모하며 시와 글을 받으려는 자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문을 메운다. 그들을 웅접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우리나라의 문화를 선양하고 빛내는 것은 모두 제술관의 일이다. 그래서 그 일은 번잡하고 책임이 크며 또 사신의 막하에서 만리회해를 건너가 역관의 무리들과 드나들며 일을 보아야 하니 고해가 아닐수 없다. 사람들은 이일을 두려워해서 마치 벌떼 피하듯한다.』 (『해유녹』)
제술관은 말하자면 외교문서 실무와 일선 문화교류를 책임지는「통신사의 꽃」 같은 존재였다. 통신사 행렬에서 해로의 출발지인 부산영가대에서의 해신제는 특히 빼놓을수 없는 의식이었다.
지금 영가모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으나 신공에 따르면 당시 해신제는 이랬다.
『영가대에서 해신에게 비는 것은 전례에 따른 것이다. 영가대는 부산성의 서쪽 바다위에 있는데 높이가 10여길이다. 우람한 건물 (각) 이 공중에 솟아있어 누선을 내려다보고 있다.절월과 깃발·고각·장막등 모든사신행차의 기구와 성대한 복장이 총총히 그밑에 둘러있는 모양이 마치 무성한 숲과 같다. 날이 정해지자 부산진 절제사 최진추가 영가대 낙수받이아래 제단을 설치했다.』
「도꾸가와」 막부와의 국교가 회복된후 얼마안된 1614년 권분이란 경상도 순찰사가 자성대근처 해안에 새로이 정박장을 만들었다. 파낸 토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쌓아올리니 낮은 언덕이 됐다. 여기에 그는 자신의 출생지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이름지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617년 통신사(제2차)일행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후 역대 통신사들도 이 영가대를 이용했지요. 한일 선린관계가 낳은 이 유서깊은 영가대는 일제때 허물어지고 해안은 매립돼 자취를 찾을수 없게됐어요』 이교수는 통신사 (또는 신사)가 무엇인가 연락임무를 띤 사절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어감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며 신뢰관계를 높이는 사절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가대의 해신제는 엄숙한 제전이었다고 했다.

<부산서 왜선이 선도>
통신사를 맞아 인도하기 위해 대마도에선 이미 「영빙삼판사」 일행이 도착해 영가대 밑에 정박하고 있었다. 해신제가 끝나면 이들은 바람 부는 방향을 예측, 출항시기를 결정한다.
통신사 일행을 태운 배는 마치 용양전함과 같았다.
세사신이 나누어 탄 3척의 배외에 각각 식량과 예물을 실은 종선 3척등 모두 6척이 동시에떠났다. 일행은 모두 4백79명. 『선도하는 왜선 3척이 있다. 모두 붉은 난간에 검은 장막을 둘렀는데 매우 정교했다. 또한 각각 종선이 있었고 또 왜인 너댓명씩을 태운 2척의 거룻배가사신의 배 양쪽에 마치 나래처럼 불었는데 느리고 빠름이 한자도 틀리지 않는다.』 (『해유녹』)
니시도마리를 뒤로한 신공일행은 금포를 거쳐 고후나고시 (소선월·선두항) 에 배를 댔다.
대마도는 남북의 땅덩어리가 아주 가는 지협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북측의 가장 가는 부분이 소선월이다. 이곳을 소선월이라 부르게 된 것은 지협의 남측에 대선월이 운하로 개통 (1672년)된후의 일. 원래 유신나사나 견당사들은 이곳을 「선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유신나사일행이 본토의 난파에서 타고온 배를 소선월동편에 대고, 걸어서 서편의 아소우 (천모) 만에 준비해둔 원양항해용 대형선을 갈아탔던 것이라고 이교수는 말한다.

<문인발급, 재원삼아>
『고려말이후 이곳은 해적들의 소굴이었지요. 조선조에선 「아시까가」 (족리)막부에 선린외교를 견지하면서 서일본각지의 호족들이나 이전의 해적들에게도 관직을 주어 회유했지요. 이들을 수직왜인이라 했는데 대마에만 18명이었다고 해요. 수직왜인들은 1년에 한번씩 하사받은 관복을 입고 「고신」 (관직사령)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대접도 해주고 무역면에서 우대도 했지요』
반면, 해적행위에 대해선 단호히 응징했다. 1419년 이종무장군은 2백27척의 범선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이었던 아소우만 미기포와 소선월을 철저히 쳐부수는 한편 대마도무역선의 조선왕래를 금지시켰다. 이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대마도주 종정성은 사신을 보내 앞으로 해적을 철저히 진압할것을 서약했다.
조선측은 해적진압의 전 책임을 종씨가 지는 조건으로 그에게 「문인」 발행의 권한을 주었다. 「문인」이란 해적이 아니라는 일종의 양민증명서. 이를 지참하지않은 자는 해적으로간주됐다. 대마도주는 이 제도를 이용, 「문인」발급에 수수료를 받고 무역품에도 과세, 대마도의 중요한 재원으로 삼았다. 이 「문인」 발행소가 소선월에 설치되고 매림사 중철관이 이 일을 맡아본바 있다. 그때 소선월은 흥청거렸다.
지금 소선월은 홋수 1백여호의 한촌. 오징어잡이로 생계를 잇고 있다.
규모 큰 선사로서 산허리에 자리잡았던 당시의 매림사도 불타고 없다.
지금 도로변에 서있는 매림사는 50년전에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 북단 사스나 (좌수나) 항에 도착하면 이 소식은 즉각 도내에 설치된 10개소의 봉화를 통해 남부 이즈하라 (엄원· 당시부중) 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마번주 (영주)에게 보고됐다. 이때부터 이즈하라에선 본격적인 환영준비로 부산해진다.
또한 통신사 일행은 일본측이 제공한 배를 통해 본국에 무사도착을 알리도록 돼있었는데 이배를 비선이라 불렀다. 비선은 일본의 수도에도 (강호·지금의 동경)에 닿을때까지 필요하면 언제든지 띄울 수 있는 연락선이었다.
이제 사절단의 선단은 계속 남진, 대마번주가 시시각각 그 움직임을 보고받으며 영접준비중인 이즈하라(암원)로 접근하고 있다. <글 이근성기자 사진 최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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